잘 나가던 사장님, 농업으로도 ‘성공’

[한국농어민신문 이평진 기자] 

선친 뜻 따라 보세옷 공장 접고
스물 두 살부터 담배농사 열심

돈 많이 벌었지만 고된 일 탓
벼·밭·하우스 등 ‘복합영농’ 전환 

5년 전엔 막걸리공장도 시작
주민들 재배 쌀 사용 의미 커

시설하우스, 논, 밭농사 등 복합영농에 종사하는 진천군 윤상호 씨는 농사꾼의 천성을 타고나 끊임없이 일을 만든다고 한다. 최근에는 막걸리 공장도 시작했다.
시설하우스, 논, 밭농사 등 복합영농에 종사하는 진천군 윤상호 씨는 농사꾼의 천성을 타고나 끊임없이 일을 만든다고 한다. 최근에는 막걸리 공장도 시작했다.

충북 진천군 문백면 평산리에서 복합영농을 하는 윤상호 씨(55). 스물 두 살부터 농사를 짓기 시작했으니 올해로 33년째. 그는 잘 나가는 사장님 딱지를 떼고 농사꾼이 된 케이스다. 중학교졸업 후 남 밑에서 힘들게 일하다 약관의 나이에 사장 소리를 들었다.

“스물 둘에 고향으로 내려왔습니다. 갑작스럽게 그렇게 됐어요. 아버지 말이라 거역하기가 힘들었지요. 그때만 해도 부모 말이면 무조건 따라야 하는 시대였잖아요.”

그는 보세 옷 공장을 했다고 한다. 수입도 꽤 많아 한 달에 700만원씩 벌었다고 한다. 당시로서는 적지 않은 돈이었다. 그렇게 전도유망했던 그가 하루아침에 선친의 부름을 받은 것이다. “제가 내려올 때 진천은 담배농사를 많이 했어요. 아버지도 엽연초조합 감사를 하며 4단 농사를 했는데 힘에 부친다고 그러는 거예요. 더 이상 못하니 빨리 오라는 겁니다.”

1990년, 스물 두 살에 고향으로 내려온 그는 담배농사에 본격적으로 뛰어든다. 농사규모가 100단이나 됐다. 1단을 400평 잡으니 100단이면 4만평이다. 그렇게 시작한 첫 해에 8000만원의 수익을 올렸다고 한다. 다음해에는 1억2000만원을 벌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밭농사에서 담배만한 작목이 없었다는 것이다.

“담배를 많이 했습니다. 돈도 꽤 벌었어요. 그 돈으로 청주에 원룸 건물도 사고 옥천에 아파트도 샀어요.”

담배농사 12년, 2002년 그는 담배를 접는다. 선친이 돌아가신 것도 있고 담배농사가 고된 탓에 접었다고 한다. 그는 그동안 번 돈과 융자를 얻어 땅을 산다. 전북 고창에 논을 사는데 당시 농어촌공사 융자를 받아 평당 2만3000원에 논을 샀다고 한다. 나중에 그 논을 팔아 고향인 진천에 논을 사서 지금까지 논농사를 짓고 있다. 논농사 규모는 3만평. 1만5000평이 무농약 친환경이고 나머지 절반이 관행농사다.

무농약 벼는 전량 농협으로 나가는데 일반 벼에 비해 40kg 한 포당 만원 꼴은 더 받는다고 한다. 농협에서는 이 무농약쌀을 학교급식으로 납품하고 있다.

벼농사를 하면서 공동육묘장을 운영하고 있다. 육묘 규모는 2만장 가량. 약 20만평의 논에 모내기를 할 수 있는 양이다. 절반은 농가에 팔고 절반은 그가 직접 이앙작업을 한다고 한다. 가을에는 수확까지 임작업 대행을 하면서 수익을 올리고 있다.

그는 복합영농을 한다. 논농사와 함께 시설하우스 농사를 짓는다. 규모는 200평 하우스 열 다섯 동 정도. 처음에는 진천군의 특산물 중 하나인 오이농사를 졌다고 한다. 그러나 일손이 많이 들고 일을 도와주던 인부들이 나가면서 수박으로 돌렸다고 한다.

“수박은 크게 손이 필요 없어요. 순치기 작업할 때 여섯 명씩, 다섯 번 정도만 인력을 사면 끝나요. 지금은 일손 구하기가 힘들어서 작목을 바꿀 수밖에 없어요.”

수박농사는 단작으로 끝낸다. 가을 수박은 시세가 좋지 않아 후작으로 애호박을 심는다. 7월초에 수박을 수확한 후 8월 중순경 호박을 정식하면 10월 중순쯤 서리 내리기 전까지 수확을 한다.

“처음에는 수박 후작으로 방울토마토를 했어요. 그런데 일손도 많이 들고 값이 불안정해요. 한 번은 서울 가락동으로 올렸는데 박스당 2000원이 나왔어요. 박스 값하고 운송료 빼면 적자예요. 그래서 애호박으로 바꿨습니다.” 물론 애호박도 가격 등락이 심한편이지만 방울토마토보다는 낫다고 한다.

논농사 3만평과 하우스 농사가 전부가 아니다. 이모작으로 검정보리 3000평을 하고 밭농사도 같이 한다. 밭농사는 참깨와 고추를 각각 1000평씩 한다. 고추를 한창 딸 때는 건조기 세 대를 돌려도 부족할 정도로 많이 나온다고 한다.

“어떤 이들은 ‘소처럼 일만 하냐’고 하는데 비료나 자재비는 계속 오르지 수익은 떨어지지 도리가 없습니다.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하는 겁니다.”

일하는 게 농사꾼의 천성이어서 그런 가 그는 끊임없이 일을 만든다. 5년 전에는 막걸리공장도 시작했다. 그가 사는 ‘통산마을’ 주민 34호와 공동으로 영농법인을 설립하고 막걸리를 만들어 팔고 있다. 조합 이름이 ‘신통방통영농조합’이다.

여기서는 흑미 막걸리와 일반 막걸리, 또 청주 종류를 생산한다. 홍보가 덜 돼 많은 양이 팔리진 않지만 주민들이 농사지은 쌀로 막걸리를 만드는데 의미가 있다고 한다.

그는 1994년 농민후계자다. 당시 1700만원을 융자받았다. 30여년 농사꾼으로 살면서 지금은 어엿한 기반을 다졌다.

진천=이평진 기자 leepj@agri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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