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은대추’ 성장 역사 이끈 산증인

[한국농어민신문 이평진 기자]

▲ 충북 보은에서 25년째 대추농사를 짓고 있는 김홍래 씨가 자신이 재배한 대추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대추농가 열 집도 안되던 시절 
과감하게 대추농사 시작
마을 주민과 함께 나무 심고
든든한 군의 뒷받침 덕에
보은군 ‘제1호 대추단지’로 

대추씨 빼는 기계 제작
즙·건조 과자 등 가공에 눈길 


충북 보은군에서 대추농사를 짓는 김홍래(58) 씨. 그는 보은군이 대추로 유명해지는데 한 몫을 한 사람이다. 올해로 대추농사 25년째. 서른 셋 나이에 대추나무 300주를 2310㎡(700평) 면적에 심고 농사를 시작했다.

그는 토박이 농사꾼이 아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 그를 농사꾼으로 만들었다. 그는 원래 월급쟁이였다. 서울에 있는 수도공고를 졸업하고 전자회사에 다녔다. 그러던 중 갑작스럽게 선친이 교통사고로 세상을 떴다. 홀로 남은 어머니를 모실 사람이 없었다. 결국 셋째 아들인 그가 고향으로 오게 됐다.

“솔직히 농사꾼 아들로 태어났지만 농사를 전혀 몰랐어요. 형님들이 여건이 안 돼 고민하다 아내한테 말을 꺼냈더니 선뜻 ‘그러자’고 하더라구요. 그래서 고향으로 왔어요.”

그러나 물려받은 땅이라곤 한 평도 없었다. 산림조합 작업단에 들어가 벌목을 하고 조림을 하면서 돈을 벌기 시작했다. 그러다 접한 게 대추였다.

“그때도 대추묘목 한 주에 5000원 했어요. 주변에 물어보니 부르는 게 값이라고 해요. 이거다 싶어 대추를 심었어요.”

그가 처음 대추를 심을 당시 보은군에는 대추농가가 채 열 집이 안 됐다. 규모도 대부분 아주 작았었다. 대추는 2년 만에 수확이 됐다. 다니던 회사 사장한테 선물을 하고 직원들에게도 보냈다. 그랬더니 맛있다며 구매자가 생기기 시작했다. 이에 자신감을 얻은 김 씨는 생대추를 길에서 처음 판매하기 시작했다. 그가 사는 동네는 속리산으로 통하는 곳이어서 관광객이 적지 않았는데 이들을 상대로 판매에 나선 것이었다.

“아내가 집 바로 옆 길가에서 판매를 했어요. 그랬더니 하루에 200만원, 300만원은 우습게 팔더라구요. 동네 사람들이 신기하다고 했어요. 그때부터 자기들도 한 번 해볼까 하는 마음이 생기기 시작한 거예요.”

때마침 당시 군수도 대추에 모든 걸 걸고 있었다. 명함에 ‘대추군수’라고 찍을 정도였다. 지금은 고인이 된 이향래 전 군수였다. 김 씨는 주민들을 모아놓고 군수를 모셔왔다. 그러고는 ‘대추를 심을 테니 군에서 도와 달라’는 청을 했다. 그래서 마을 36가구 중 24가구가 대추를 심게 됐다. 주민들은 속리산으로 통하는 길가 주변에는 모두가 대추를 심었다. 그렇게 그가 사는 마을 성족리가 보은군 대추단지 1호가 됐다.

지금도 성족리 마을 주민들은 생대추를 길가에서 다 판매를 한다. 별도의 판매처가 없어도 보은대추가 널리 알려지면서 판매에 큰 어려움이 없다.

대추는 이제 보은군 농업의 기둥이 됐다. 김 씨가 처음 농사를 시작했을 때는 손에 꼽을 정도였으나 지금은 생산농가가 1500호나 된다. 명실공히 최고의 지역특산물이 된 것이다. 또 해마다 대추축제가 열려 엄청난 양의 생대추가 소비자들에게 팔려 나간다.

“축제가 큰 역할을 합니다. 규모가 적은 농가는 판매가 마땅치 않잖아요? 축제 때 대부분 생대추를 소화합니다.”

그러나 김 씨는 축제장에서 판매를 하지 않는다. 그가 관리하는 고객과 길거리 판매로도 충분하기 때문이다.

“저는 한 번도 축제장에 기웃거린 적이 없어요. 대농들은 자기 판매처를 가져야 합니다. 판매에 어려움을 겪는 소농들이 축제장을 이용하는 게 맞습니다.”

그가 생산하는 대추는 생대추로 40%, 건대추로 60%가 팔려 나간다. 생대추 소득이 훨씬 좋지만 품질이 따라주지 않으면 생대추 판매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 같은 현실은 농가의 공통된 상황이어서 개선이 필요한 대목이라고 한다.

그는 가공제품에도 눈을 돌리고 있다. 대추즙은 기본이고 대추씨를 빼고 잘라서 편으로 건조한 과자도 만들고 있다. 보은군에서 대추씨 빼는 기계를 처음 만든 사람도 김홍래 씨다.

“자다가 별 생각을 다했어요. 어떻게 하면 씨를 쉽게 뺄까 고민하다가 우산대를 갈아서 씨를 빼는 방법을 생각해 냈어요.”

이를 계기로 지금은 간단한 기계가 제작돼 농가에서 쓰고 있다. 대추선별기도 김 씨의 작품이다. 대구의 한 업체와 협의를 계속하면서 현재 농가에서 사용하는 대추선별기를 만든 것이다.

월급쟁이에서 농사꾼이 된 김 씨. 심정이 어떨까?

“전혀 후회 없어요. 크게 찌들지 않고 생활할 수 있으니 됐지요. 잘 왔다는 생각을 합니다.”

보은=이평진 기자 leepj@agrinet.co.kr

관련기사

저작권자 © 한국농어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