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속박이는 사절’ 농사철학…도매시장·소비자와 신뢰 두둑

[한국농어민신문 윤광진 기자]

논산에서 딸기, 쌀농사를 짓는 오광수·김수옥 부부는 최고의 농산물을 생산하면서 악기연주를 통해 제2의 인생을 즐기고 있다.

90년대 초 딸기 수막재배로 대박
‘최고 품질’로 시장서도 알아줘
코스트코 전국 매장에도 공급

벼농사에 육묘까지 바쁘지만
아내와 함께 악기 다루는 재미 푹
요양원 등서 공연하며 봉사활동도

“농민 ‘딴따라’로 오해 받을 수 있지만, 절대 아니거든요. 인생 60 넘어 즐기며 살고 있어 너무 좋아요.”

충남 논산시 상월면에서 딸기 농사짓는 오광수·김수옥 부부는 최근 몇 년 간 ‘인생 황금기’를 맞고 있다. 농사일에 뛰어든 지 40여년이 지난 오광수 농업경영인의 나이는 올해 64세. 부부는 6년 전 악기를 배우면서 40~50대 중년 못지않은 삶의 열정을 만끽하며 살아가고 있다.

“가끔은 악기 연주에 몰두하곤 해요. 집 사람과 함께 하면 모든 근심 걱정 다 사라지고 인생살이 사는 맛이 절로 난다”는 오 씨의 귀뜸이다.

남편은 섹스폰에, 부인은 드럼에 푹 빠졌다. 드럼 하나로 만족 못해서인지(?) 부인 김 씨는 최근 들어 섹스폰 레슨까지 받고 있다.

“힘들고 짜증 날 때 악기를 쳐다만 봐도 스트레스가 확 날아가고, 부부 금슬도 더 좋아져 농사일에 더 집중할 수 있어요.”

이 같은 김 여사의 말처럼 두 부부는 거실 한 쪽에 자리 잡은 악기 세트를 애지중지 하며 인생 활력소로 삼고 있다. 그럼에도, 농사일엔 최선을 다하고 있다. 딸기와 육묘, 벼농사로 1년 내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진짜 바쁘면서도 부지런한 농사꾼은 잠깐의 짬을 활용하는 법을 알게 되고, 우리 부부는 바로 그 시간을 잘 활용하고 있는 거지요.”

오 씨는도시에서 잠시 직장생활을 했으나, 제대 후 곧바로 접고 고향 상월면으로 들어와 부인 김 씨와 결혼을 하고 본격 농사에 매진했다. 벼농사와 딸기농사를 시작한 오 씨는 1990년대 초 딸기 수막재배로 대박을 터트렸다.

비닐하우스 1동 당 600여만원의 조수입을 올렸다. 남들은 80~90만원 정도였으니, 오 씨의 소득은 6배 이상인 셈이다. 이 바람에 주변 대부분 농민들이 딸기 수막재배를 시작하는 붐이 일었고, 딸기 수막재배의 선구자로서 농가소득 증대에 기여한 공로로 1994년도에 농협에서 주관하는 새농민 상을 받기도 했다.

그의 농사철학도 되새겨 볼 만하다. 그의 인생에 있어서 일명 ‘속박이’는 찾아 볼 수 없다.

‘양심과 명예를 팔아 돈을 더 벌 것인가, 아니면 소비자와 도매시장 상인들의 신뢰를 확보할 것인가’ 라는 기로에서 그의 선택은 간결하고 명료했다.

“평생 ‘속박이’는 사절한다” 는 다짐과 힘께 그의 농업소득은 오히려 더 늘어나는 변곡점을 맞이됐다.

오 씨가 생산한 딸기는 대전광역시 오정동 농수산물도매시장에도 출하되고 있는데, ‘품질 최고’, ‘속박이 근절’ 등 그의 명성이 널리 알려지면서 딸기는 시장에서 최고로 통했다. 이 때문에 10년 전 대형유통업체 코스트코와의 인연을 맺게 됐으며, 지금은 지역 농민들이 생산한 것과 함께 대형 유통매장인 코스트코측의 산지 집하장에 출하하고 이를 코스트코 측이 자사 전국 매장에 공급하고 있다.

벼농사도 꽤 많은 편이다. 몇 년 전까지 7만평을 재배했으며, 이 중 8000여평을 친환경으로 농사지었다.

“미래 주역인 꿈나무 학생들이 먹는 거잖아요. 정직하게 농사지어야죠.”

오 씨는 학교급식용으로 공급키 위해 우렁이농법을 적용한 고품질 안전 쌀을 생산해 연무농협 미곡종합처리장에 전량 납품했다. 그러나 몇 년 전부터 벼농사는 3만평으로 줄이고 딸기와 딸기육묘 사업에 전념하고 있다.

부인 김 씨는 “마음의 여유를 찾게 되어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며 “그래도 1년 연중 바쁘게 일하고 있어 결코 ‘날라리’ 농사꾼은 아니다” 며 웃음 지었다.

4월에 딸기 육묘를 식재하여 9월경에 기른 육묘를 공급하고 나면, 10월말부터는 딸기를 수확하여 이듬해 6월초까지 수확하느라 바쁘다. 오 씨 부부의 비닐하우스는 8동이다. 이곳에서 딸기 고설재배와 육묘 사업을 하고 있는데, 워낙 농촌일손 부족이 심해 외국인 근로자 1명을 고용한 상태다.

오 씨는 “욕심은 금물” 이라고 말한다. 외국인을 더 고용하면 편하지만, 자신과 부인 둘이 열심히 일 하면서 최소한의 부족 일손만을 외국인 근로자에 의존해야 탈나지 않고 안정적으로 영농에 종사할 수 있다는 조언이다.

오 씨는 농권운동과 사회 봉사활동 또한 열심히 했다. 한농연논산시연합회 상월면회장, 이장, 농협이사, 소방대장 등을 역임했다. 요즘은 동호회 ‘드럼 앤 섹스폰’ 에 가입해 요양원 등을 돌며 공연하는 등 봉사활동에 빠지지 않는다.

작금에 오 씨는 미래 영농에 대해 걱정하지 않는다. “공무원으로 근무하고 있는 아들과 사위가 정년 후 대를 이어 농사지을 마음 준비가 돼 있어 다행” 이라며 농촌 삶에 대한 희망의 불씨를 간직했다.

논산=윤광진 기자 yoonkj@agri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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