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명자

[한국농어민신문] 

오후4시쯤 되자 서향집인 우리 거실에 햇볕이 들어왔다. 내 멍한 눈길은 거실 바닥을 지나 구석으로 향하는 볕을 따라간다. 한 달이 넘도록 방치한 물건들 위로 먼지가 뽀얗다. 정리하려고 쌓아둔 액자와 사진틀, 운동기구 등이 베란다를 온통 차지하고 있다. 볕은 동굴 속에 갇힌 듯 꿈쩍 않는 나를 나무라는 듯 밝은 곳으로 손을 잡아끄는 것도 같다.

달포 전, 나는 혼자가 되었다. 시도 때도 없이 우울해지는 마음 때문에 밖에서는 씩씩한 척해보지만, 혼자 있을 때는 목 놓아 엉엉 울 때가 많다. 울고 나면 가슴이 조금 후련해지기도 한다.

나는 요즘 많은 것이 낯설다. 매사에 허둥대기 일쑤다. 익숙하게 다니던 길도 신호등을 무심히 지나쳐 범칙금이 며칠이 멀다 하고 날아든다. 차는 어디서 부딪친 줄도 모르게 찢기고 긁혀 내 가슴의 상처를 보는 것 같다. 마음이 시끄러울 때는 책 읽는 일로 시간을 보낸다. 어제는 책꽂이를 뒤적이다 남편이 작성해 놓고 간 ‘존엄사 선언서 의료행위 사전 지시서’를 보게 되었다. 2019년 9월 20일, 남편이 쓰고 서명 날인한 문서였다. 

이렇게 꼼꼼하게 작성해 놓고도 공개하지 않은 남편의 마음을 헤아려본다. 남편도 나처럼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믿었나 보다. 그래놓고 기어이 가버린 사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나는 통곡하고 말았다. 

‘나의 존엄사 선언이 충실하게 실행될 수 있도록 노력해 주신 분들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로 마무리한 선언서를 들여다보며, 남몰래 이 문서를 작성한 남편의 심정이 얼마나 고독했을지 짐작해본다. 아무리 부부라 해도 대신해 줄 수 없는, 혼자 고스란히 짊어져야만 하는 버거운 짐, 나에게조차 말도 안 하고 남편은 혼자 어떻게 감당했을까. 

6년 전이었다. 의사가 담담하게 전하던 폐암 선고는 너무도 충격이었다. 다른 장기로 전이된 심각성을 우리 내외를 앉혀놓고 솔직하게 말했다. 걷잡을 수 없이 내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은 본 남편이 “괜찮아.”하며 오히려 나를 위로했다. 그렇게 남편의 투병은 시작되었고, 우리는 최선을 다했다.

우리는 46년을 함께 살았다. 짜그락대며 싸울 때도 많았고, 헤어지네마네 하며 큰소리가 오갈 때도 있었다. 그렇지만, 며칠 후면 여느 때처럼 나란히 앉아 집안일을 상의했고, 남편이 좋아하는 찬으로 식탁이 차려지곤 했다. 엄청나게 그 사람을 사랑해서라기보다, 내 삶의 한 축이 무너지다 보니 새록새록 못 해준 것만 생각난다. 남편은 바깥출입이 자유롭지 못하게 되자, 여러 곳에 맡고 있던 단체장 직을 임기가 끝나기도 전에 하나둘 내려놓기 시작했다. 맡은 일을 잘 마무리하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며 말했다. 

“여보, 그래도 나는 잘살았어.” 남편의 속마음을 아는 나는 자기 몸 생각은 둘째 치고 바깥일에 마음 쓰는 것을 보고 있자니 속이 상했다.
“내가 원하는 건 당신 건강뿐이야."

그렇게 6년이나 투병해 왔는데 이별은 거짓말처럼 너무도 갑자기 찾아왔다. 남편이 떠난 상실감과 혼자라는 두려움은 한꺼번에 오는 걸까. 지금 내 명치 끝에는 아릿한 아픔이 가득하다. 소용돌이 안에 있을 때는 긴박한 상황에서도 잘 몰랐다. 

모든 것이 끝난 뒤 밀어닥치는 고독은 떨쳐 내지지 않는 피로감과 겹쳐 몹시 버겁다. 기운도 없고 해서 나는 특별한 일이 아니면 혼자 조용히 지낸다. 그 모습이 안타까워 남편이 볕과 함께 나를 찾아온 걸까.

“여보, 당신 이러고 있으면 안 돼.”

남편의 임종 때 내가 하던 말인데 지금은 남편이 나를 타이르고 있다. 언제나 당신 곁에서 별빛으로, 달빛으로, 그리고 햇살로 머물 거라고 손을 잡아 일으키고 있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한국농어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