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효순

[한국농어민신문]

한파에 고드름이 주렁주렁 열렸다. 예전 같으면 왁자하니 회관에서 즐거울 텐데 코로나 19 때문에 문을 열지 못하고 마을 형님 동생님들이 줄 맞춰 산책하는 것이 일과가 되었다. 산책이 끝나고 대여섯 명으로 나눠 이집 저집으로 흩어져 들어간다. 엄마가 놀지 말라는데 몰래 모여 노는 아이들처럼.

그 대신 당연히 손 소독제는 기본이고 마스크 열심히 쓰고 발열체크도 스스로 한다. 모이는 집 주인은 무전을 부쳐주거나 고구마를 삶아주는 것은 기본, 집안에 있는 먹을 것들을 아낌없이 푸짐하게 내어 놓는다. 그러면 또 엄마 몰래 숨어서 과자를 먹는 아이들처럼 조심스럽지만 맛있어 한다. 그러다보니 누가 더 잘 간식을 주나가 되어버렸다. 어제 연실엄마는 떡하고 식혜를 만들고 잔칫집 상 차리듯 걸게 내놓아 부담스럽다 하면서도 모두 싱글벙글이다. 이렇게 평범한 행복을 멀리 한지 벌써 일 년이 넘었으니 혼자 있기에는 너무 심심해 우리 엄마들 거리두기 약속을 살짝 어길 만도 하다.

어제 의순이 형님네는 다섯 명이 모이자 얼른 대문을 닫았다고까지 했다. 윗집 형님이 그랬다고 투덜거리지만 다행이다. 오늘 옆집형님 속옷 색깔이 노랑인지 파랑인지 알만큼 허물없는 한동네 이웃들이 모여 노는 곳에는 더 이상의 세련된 대화는 사절이다. 딱 30년을 함께 살아온 부부의 정, 아니면 초등학교 3학년정도의 대화이랄까. 완곡한 표현의 말은 절대 불가요. 오직 감정에 충실한 말만 오고 간다. 가끔 저 말 때문에 싸우면 어떻게 하나, 아슬아슬 불안하지만 그야말로 부부싸움 칼로 물 베기다. 언제 우리가 다투었나. 시치미 뚝 떼고 잘 논다. 오늘은 가지 말아야지. 어쩌다 보면 다섯 명을 넘게 모이니 나라도 가지 말아야지. 그래 차분하게 앉아 글도 읽고 책도 봐야지. 결심은 마음으로 끝난다. 전화가 자꾸 울린다. “네 요즘 일상은 우리랑 함께 해야 한다.”, “살아도 죽어도 함께 이 겨울을 보내야 하며 너도 나도 모두 한 방죽에 든 미꾸라지인데 너라고 무슨 특별난 것 있느냐”며 성화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나는 또 기다렸다는 듯이 슬그머니 십원짜리 동전을 한 지갑 넣고 일어선다.

오늘은 우리 집으로 일행이 들어섰다. 뭐 내 놓을 음식이 없을까. 걱정이 되긴 하지만 그 보다 실컷 웃을 수 있다는데 이 보다 더한 보약은 없으니 싫을 이유가 없다. 길가집이라 사람들이 더 모이면 어쩌나 걱정하는 나를 보고 아짐이 천연스럽게, 그래서 신발을 모두 감추고 들어왔단다. 마음이 편치 않는 이 세상이 어서 끝나기를 바래본다. 걱정을 하면서 우리는 또 고스톱 판을 벌인다. 평소 길에 떨어진 십 원짜리는 허리 굽혀 줍기 싫어 그냥 지나친다면서도, 이곳에서는 십원이 백원의 가치로 통한다. 내 너를 위해 만원으로 밥은 얼마든지 살수는 있지만 지금 십원은 절대 안 된다며 잘못 계산된 십원을 기어이 받아 낸다. 평균 나이 칠십의 노인들이다.

하는 짓이 가끔 치매 초기행동으로 나오기 마련, 그럴 때마다 마스크 속에서 웃음꽃이 자지러든다. 집안 형님, 당숙모도 잠깐 보류 중이다. 자그마치 한 동네에서 짧게는 30년, 길게는 60년도 더 넘게 살아온, 같이 아이 낳고 같이 품앗이를 하면서 피붙이 보다 더 진한 정을 가진 이웃사촌들이다. 자식들은 몰라도 옆집 형님, 아우는 지금 뭘 걱정하는지 알고 있을 만큼.

“야 이 멍청아 너 그거 뭔지나 알고도 내 놓는 거여!”

상대편이 고도리를 두 짝 따다 놓았는데 그 화투 패를 내 놓은 형님에게 거침없이 쐐기를 박는다. 

“에이구! 내 나이 되어보랑께! 지대로 뵈이는 게 얼매나 어려운가. 흐 흐.” 

능청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어쩌다가 조커 한 장 들어오면 아짐에게도 대뜸 의기양양이다.

“빨리 죽으쇼. 나는 살아야 쓰것소.”

“엔병 아나 많이 살아라. 나는 죽는다!”

묵은 정이 뚝뚝 떨어져 필요이상 요란한 웃음소리들이 마당으로 퍼진다. 아까부터 감나무에 앉아서 기웃거리던 직박구리 새 한 마리 화들짝 날아간다. 한수 더해 어릴 적 들었던 욕설이 거침없이 나오면 오랜만에 아이로 돌아간 느낌까지 든다. 어매가 말 잘 안 듣는 아이 나무라던 그 욕처럼. 마음껏 잠깐이라도 웃어대는 주름진 얼굴들에서 어제의 고달픔이 녹아든다. 밖에서는 잠포록하니 함박눈이 쏟아진다. 음력설을 쇠고 나면 또 다시 들판에서 고단하게 움직일 사람들이다. 단 꿀 같은 농한기철이지만 우리 너무 가깝게 잘 놀고 있는 거 아닌가 걱정하는 나를 보며 아짐이 미쁘게 눈을 흘긴다.

“걱정 마 지금 우리한테 코롱난지 고롱난지 얼씬도 못혀.”

“암만 지까짓 코로나 우리에겐 어림없어!”

그럼요. 그럼요. 마스크 잘 쓰고, 손 잘 씻고, 밥 잘 먹고, 잠 잘 자고, 우리 조금만 더 참읍시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한국농어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