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옥 한국농어촌여성문학회 회원 충남 공주/오이농사

[한국농어민신문]

밤 11시, 한참 잠이 들어 있는데 전화벨이 울린다. 잠결에 깜짝 놀라 받고 보니 농산물 시장 경매사로부터의 전화이다. 오이에 약간의 불량과가 있어서 경매가가 조금 떨어졌단다. 전일 가격에 비해 거의 2만원이 하락했다. 코로나 19 확산으로 사회적 거리 두기가 2.5단계로 격상되면서 오이값 하락은 예상했던 바다. 남편은 무심한 목소리로 알았다고 대답한 뒤 별 말없이 전화를 끊는다.

기분이 상한 나는 납득할 수 없다며 이불을 걷어차고 일어나 뿔뿔 거린다. 30년 오이 농사 전문가라는 자부심으로 선별 포장해 올려 보낸 오이다. 언제나처럼 세밀하게 선별했는데 무슨 불량과가 있느냐고 화를 낸다. 남편은 그러는 나를 보고 한마디 한 뒤 도로 자리에 눕는다.

“있나 보지, 들어갈 수도 있잖아.”

오이는 일 년에 두 번 심는다. 1월 정식인 봄 오이와 9월 정식인 가을 억제 오이이다. 봄 작기는 7월에 마무리하고, 가을 억제 오이는 12월 말까지 따고 곧바로 1월에 정식한다. 그 때문에 우리가 쉴 수 있는 시간은 고작 8월 한 달 뿐이다. 오이를 심을 때는 일주일 정도의 시간이 걸리는데 이 과정이 가장 바쁘고 힘든 작업이다. 밑거름과 미량요소로 오이가 자라기에 최적의 영양 상태를 만들어 준다. 갈고 로터리 작업 서너 번, 그다음 관리기로 고랑을 타고 쇠스랑으로 매끈하게 고른 뒤 비닐 멀칭을 하고 오이를 심는다. 갓 심은 오이가 잘 자랄 수 있도록 제때 맞추어 물과 각종 영양제를 관주하고, 최적의 온도를 맞추어준다. 벌레나 병이 달라붙지 않도록 집중 관리를 해야 하기 때문에 단 하루도 하우스를 비울 수 없다. 줄기와 잎이 자라기 시작하면 필요 없는 곁가지와 누런 잎을 제거해주고, 넝쿨이 넘어지지 않도록 매일 집개로 고정해주다 보면 팔다리 허리가 비명을 질러댄다. 하지만 이내 연록의 잎 사이로 수줍게 내미는 노란 꽃잎들이 마디마디 피어나면 어느새 훌쩍 자란 오이 향이 온몸의 피로를 거두어들인다. 이렇게 온갖 정성을 다하여 키워낸 것들인데….

지난 한해는 그야말로 정신을 쏙 빼놓고 살아 온 것 같다. 사상 초유의 긴 장마와 태풍으로 오이 작황도 좋지 않았다. 수확량이 줄어 높은 가격을 기대했지만, 코로나란 복병이 지칠 줄 모르고 장벽처럼 버티고 있으니 답답한 마음이 오죽하겠는가. 확진자 상황에 따라 농산물 가격도 오르락내리락하니 이래저래 마음이 무겁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코로나에 온통 시선이 쏠리고 마음마저 뒤숭숭한 하루하루가 긴장과 두려움으로 삶의 본질조차 망각해 가는 듯하다. 매일 코로나 확진자 현황을 들여다보고 이러다 우리 집 문 앞까지 들이닥치는 건 아닌지 조바심하며 살아온 지 벌써 일 년이 되었다. 이런 와중에도 씨앗을 심고 가꾸고 수확하는 일상이 농사꾼에게는 오늘을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이다. 세상을 바라보면 답답하고 막막하지만, 다시 일터로 돌아오면 연록의 생기를 회복하게 된다. 그렇게 비와 바람과 햇살이 공존하는 자연의 순리가 또 하나의 삶으로 열매를 맺어간다.

돌이켜 보면 우리 인간의 무절제한 환경 훼손이 자연재해뿐만 아니라 기후변화의 원인을 제공하였고, 코로나 19 바이러스 같은 재앙을 불러온 것이 아닐까 싶다. 먹거리를 해결하는 농업의 발전도 기후 변화의 원인 중 하나라고 하니 이 불편한 진실이 아이러니하다. 자연적 원인이든, 인위적 원인이든, 반드시 받은 만큼 되돌려 주는 자연. 이 당연한 이치를 알고도 아직은 먼 미래일 것이라는 안일함에서 이제 벗어나야 하지 않을까.

이렇게 열매가 자라기까지 수많은 시간과 애정을 쏟으며, 어쩌면 자식보다 더 공들여 키워 낸 것들, 먼 길 떠나 푸대접을 받은 것 같은 상한 마음에 밤새 뒤척이다 새벽녘에서야 잠이 들었다.

간신히 잠이 들었나 싶더니 거실 한 귀퉁이에서 핸드폰 알람이 요란하게 울려댄다. 허리통증을 살살 달래가며 엉금엉금 기어가 몸을 일으킨다. 고된 노동에도 자고 나면 거뜬하던 날이 어제 같은데, “아이구” 곡소리가 절로 나오는 요즘, 나도 나이를 먹었나보다. 패딩 조끼에 오리털 파카를 걸치고 목도리와 마스크로 완전무장하고 현관문을 나선다. 종종걸음으로 새벽을 나서는 길에 자꾸만 오이 경매가격에 마음이 쓰인다. 속상한 마음이 쉬 가시지 않는다.

풀 섶에 하얗게 서리가 내렸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밤새워 뒤척이며 씩씩거리던 날 선 내 마음처럼 날카롭다. 이 마음을 녹여줄 약은 하우스에서 싱그러운 오이를 만나는 것이다. 고 이쁜 것들을 만나면 값은 둘째고 날카로운 마음도 금세 스르르 녹는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별이 총총하다. 오늘은 날씨가 맑으려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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