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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여담] 지나간다백계순

[한국농어민신문]

자줏빛 구름이 청 보리밭을 감싸고 있다. 또 다시 자운영꽃은 피었다. 코로나19 감염 확산 소식이 뉴스 채널을 온통 점령하던 지난 달, 갑작스러운 사고로 병원 신세를 지게 됐다. 병실에 들어오던 그날만 해도 어린 보리는 짓 밝힌 발자국 아래서 서서히 고개를 치켜들고 있었다. 자운영도 어디에서도 피어날 것 같지 않았다.

허리 골절의 제일 좋은 치료 방법은 저절로 뼈가 붙는 자연치료로 병원 침대에서 등을 떼지 않는 거였다. 한 달을 침대와 한 몸이 되어 있어도 허리는 가벼워지지 않았는데 팔순의 할머니가 입원한 지 사흘 만에 시술을 하고 당당히 걸어서 병실 문을 나서는 게 아닌가.

벚꽃의 몽우리가 한낮의 길이만큼 부풀어 오를 때도, 만개한 꽃잎들이 창밖을 환하게 밝힐 때도 움직이지 않던 마음이 할머니로 인해 쿵 무너졌다. 주치의 선생님은 자연적인 치료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려주셨지만 허망하기까지 했다.

골다공증이 있는 어르신들의 치료 방법이었지만 당시 순간에는 그것만큼 부러운 게 없었다. 어쩌다 누워 지내는 신세가 되었는지 한탄스러울 뿐이었다. 2주간을 누워서 먹고, 생리적인 현상을 해결했다. 옆으로 돌아누울 수도 없었다. 평범한 일과가 가장 특별한 일상이 되었다.

시간을 보내는 방법 하나는 링거 병을 올려다보며 수액이 떨어져 혈관으로 들어가는 시간을 재는 것이었다. 퇴원을 앞당기는 것도 아닌데 간호사가 3초로 세팅을 하고 돌아가면 나는 늘 2초로 앞당겨 놓았다. 가끔은 책을 봤지만 천장을 향해 두 손으로 책을 받쳐 들고 하는 독서는 오래 할 수 없었다. 손목에 파스를 붙일 정도로 통정이 왔다. 노트북도 오래 하지 못했다. 그것 역시 목과 손에 무리를 주었다.

입원환자 중에는 코로나19 감염예방에 필수인 마스크를 구입 하려다 다친 분이 많았다. 내 방만 해도 룸메이트 4명 중 세 명이었다. 한 분은 싸게 많이 준다는 점포 앞에서 줄을 서다 미끄러져 발등이 골절되었고, 또 한 분은 약국 앞에서 줄을 서다 후진하는 차에 넘어져 팔을 다쳤다. 또 한 사람은 줄을 서 있다가 새치기로 오인되어 맞붙었다고 한다.

학교 개학이 늦어져서 유기농 채소를 납품하던 농가가 밭을 갈아엎었고, 문을 닫는 자영업, 실업자 수를 헤아리기 힘들다는 소식이 뉴스에서 빠지지 않았다. 입원 당시 우리 동네 국산 두부 공장도 간판이 없어지고 문이 닫혔었다.

창밖을 내다볼 수 있는 시간이 길어졌다. 링거액에 맞추던 시선이 산벚꽃이 물들고 있는 먼 산을 향했다. 세 자릿수를 고수하던 감염 확진자 수가 두 자리 수로 낮아졌다. 세계 각 나라에서는 우리나라만큼 코로나19 감염에 잘 대처하는 국가가 없다고 부러움과 칭찬이 넘쳤다. 

주치의는 이제 퇴원해도 된다고 했다. 완치가 된 것은 아니지만 병원이 아닌 집에서 잘 관리하라는 것이었다. 아직 십 분을 걷기 힘든 상황에 세상에 나가기가 두려웠지만 기뻤다. 조심조심 걸음을 떼며, 다시 걸음마 하는 심정으로 사십 일 만에 바깥공기와 마주했다.

완연한 봄이 맞이한다. 부드러운 봄바람이 지나가며 청보리밭은 비단결 융단이 된다. 모내기를 위해 매끈하게 다듬어 놓은 논들은 단발머리 여학생같이 단정하다. 변하고 있는 논 뜰이 또 다른 용기를 준다.

병원에서 접하는 바깥소식은 우울한 것뿐이라 이번 봄은 상처의 계절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모든 것은 다시 시작되고 있다. 공장문은 닫혔어도 보리는 하늘 높은 줄을 알고, 얼었던 논과 밭은 연두로, 녹색으로 채워지고 있다. 멀리 있던 산들이 어느새 바로 곁에 와 있다.

늘 그랬다. 메르스도, 사스도 다 지나갔다. 조류인플루엔자가 와도 닭장에는 다시 병아리가 자랐다. 소 파동에도, 돼지 파동에도 축사는 다시 채워졌다. 우리를 힘들게 했던 모든 것은 지나갔다. 멈추지 않는 것은 오직 농어촌을 지키는 우리뿐이었다. 선사시대부터 현재까지 변하지 않는 것은 흙과 함께 한, 가축을 내 가족처럼 돌 본 우리였다.

또다시 과수원엔 꽃을 수정하는 ‘사월의 보쌈 꾼’들의 웃음이 퍼질 때다. 이제 저 자운영꽃도 풍년 농사를 위해 내년을 기약하며 물러나야 한다. 가끔은 불청객이 우리를 힘들게 해도 자연의 법칙 앞에서는 순간이다.

모든 것은 스치고 지나간다. 신종 코로나19, 지나간다. 우리의 아픔, 다 지나간다. 저 청보리가 누렇게 들을 채우기 전에, 매끈한 논 뜰에 벼꽃이 피기 전에, 모든 것은 지나간다. 나 역시도 보조기를 버릴 날이 머지않으리라.

/백계순 한국 농어촌여성문학회 편집장, 수필세계등단, 전국근로자문학제 수필 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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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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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해인 2020-04-24 06:10:21

    코로나로 흉흉한 시국에 마음까지 따뜻해지는 글이네요, 어서 코로나도 지나갔으면 좋겠습니다...모쪼록 허리 어서 회복하시고 앞으로도 이런 따뜻한글 써주세요^^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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