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안

[한국농어민신문]

농사꾼 세월 사십 년에 이런 장마는 처음이다. 두 번째 품종 복숭아를 딸 때 시작해 네 번째 품종을 수확하는 지금까지도 비는 줄기차게 내린다. 한 바구니 따면 운반차로 가서 비닐 덮개를 들추고 한 알 한 알 작업 상자로 옮기기를 반복한다. 사람 몸 젖는 것보다 복숭아 젖는 것이 더 마음 쓰이는 요즘이다. 예년 같으면 숨 막히는 폭염의 팔월 초순이건만 몸이 젖은 지금은 으슬으슬 춥기까지 한 날씨다. 모자챙에서 낙숫물처럼 떨어지는 빗물이 야속하다.

맞은편에서 복숭아 따는 딸은 말이 없다. 이렇게 쏟아지는 빗속에서 복숭아 따는 일이 힘들어서 조용한 것이 아니다. 꽃샘추위 유난하던 이른 봄부터 땀 흘려 가꾼 복숭아가 오랜 장마로 엉망이 되어버렸으니 할 말을 잃은 것이다. 만족해하는 소비자의 반응을 상상하며 좋은 복숭아 생산에 공들인 지난 계절의 노력이 다 헛짓이었나 싶은 게다.

액비를 담아 넣어주고, 과다 결실도 시키지 않았으며, 무농약 재배하느라 남들보다 더 많이 노력했고, 웃자란 가지도 잘 정리해 햇빛이 고루 들도록 해 주었는데…. 그 모든 노력에도 도통 해가 뜨지 않으니 당도가 떨어진다. 물을 너무도 많이 흡수해 쩍쩍 갈라진 것도 많다. 뿌리를 물에 담그고 있다시피 한 날이 지속하자 여기저기서 복숭아가 툭툭 떨어진다. 걸을 때마다 발에 차이는 복숭아에 움찔움찔 놀란다. 강한 태풍에 떨어진 것이 아니라 오랜 비에 시나브로 떨어진 것은 이처럼 피해가 심해도 농작물 재해보험에도 적용되지 않는다. 어차피 썩어 거름이 될 걸 알면서도 피해 다니게 되는 농심. 애지중지 기른 복숭아가 땅바닥에 나뒹굴다가 상해가는 모습에서 딸의 마음도 멍들어가는 것이 나는 걱정이다.

올해는 이른 봄부터 예감이 좋지 않았다. 개화기 때 날마다 된서리가 내려 복사꽃의 수술이 심각한 동해를 입었고, 태풍에 버금가는 광풍이 개화기 내내 몰아친 것도 이례적이었다. 결실기 이후 우리 지역에 창궐한 노린재는 무농약 재배로 방제가 어려워 큰 피해를 보았다.

또 하나의 광풍 코로나 19 바이러스는 다른 각도에서의 어려움을 안겨주었다. 바이러스 발생 초기 신천지 발 확진자가 급증할 때, 많은 외국인노동자가 위기감을 느껴 본국으로 가버렸다. 바이러스가 잠잠해지면 다시 오려고 했는데 사태가 장기화하면서 발이 묶이고 말았다.

외국인 노동자가 못 들어오자 복숭아 봉지 씌우기도 할 때 일손을 못 구해 애를 먹었다. 3000평 과수원의 복숭아 봉지를 식구끼리 어찌어찌 싸고 잠시의 휴식 뒤에 수확 철이 왔는데 이렇게 실망스러운 결과라니.

포장 작업을 하면서 한 알 한 알 꼼꼼하게 상태를 확인한다. 작은 점이 박힌 알, 벌레가 갉아먹은 알, 개화기 사나웠던 날씨에 수정이 안 되어 삐딱하게 생긴 알, 오랜 비에 껍질이 갈라진 알…. 여러 가지 이유로 B 품으로 빠지는 복숭아가 많다. 이런 날씨는 나만 겪는 것이 아니건만 결과가 영 마뜩잖다. 올해 같은 날씨에도 농사를 잘 짓는 이웃도 많다. 나는 왜 농사도 잘 못 지으면서 무농약 재배를 고집한 걸까 하고 생각하다가 한마디 툭 튀어나왔다.

“무농약 그만둬야 하는 건 아닌지 고민이네.”

“3년이나 온 길인데 여기서 그만두는 건 아닌 것 같아. 내년에는 더 잘해보자 엄마.”

어미보다 의연한 딸의 모습이 얼마나 다행인지. 실은 나도 딸의 생각과 다르지 않았다. 내년에는 막걸리 트랩도 이른 봄부터 달아주고, 천공병 방제는 올해 가을부터 보르도액 살포로 예방에 전념하며, 결실 양은 올해보다 좀 더 늘리고, 그에 따라 거름 양도 좀 더 늘려 보리라.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올해 농사 성적이 저조하니 딸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어 그런 말을 해버린 것 같다.

포장 작업 마무리해서 농산물 센터까지 실어다 주고 집에 들어와 씻고 뉴스를 본다. 300mm 비를 동반한 태풍 장미의 소식과 함께 폭우 피해 뉴스가 화면 가득하다. 물에 잠긴 동네, 무너진 제방, 산사태, 그리고 인명사고…. 남들은 더한 일도 겪는데 한해 농사가 마음에 덜 찬다고 그토록 망연자실하다니.

돌아보면 수십 년 농사에 한 번도 완벽하게 흡족한 농사를 지어보지 못했다. 한쪽이 만족스러우면 한쪽이 기우는 농사가 대부분이었다. 내가 잘 못 한 부분도 있었고, 기후를 잘 못 만나 그르친 경우도 많았다. 그럴 때마다 마음 다잡을 때 나는 내년을 기다리고는 했다. 그렇게 기다리던 내년을 올해는 딸과 함께 기다린다.

‘내년에는 올해의 잘못을 반복하지 않으리라. 내년에는 더 잘해 내고 말 거야. 내년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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