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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여담] 가장 귀한 농사이수안

[한국농어민신문]

부드러운 봄바람에도 연분홍 꽃잎이 화사하게 날린다. 꽃잎 진자리마다 꽃잎을 닮은 꽃받침이 붓끝처럼 가지런한 수술을 감싸고 있다. 일찌감치 꽃잎을 떨군 꽃을 따 꽃받침을 지그시 눌러본다. 대체로 야문 느낌에 수정이 잘 되었으리라 믿어본다. 눈발처럼 휘날리는 꽃잎은 이제 가지마다 피어나는 연초록 어린 잎새에게 그 바통을 넘겨주고 있다. 건너편 능선에도 막 피어나기 시작한 활엽수 잎새들로 동네는 봄물에 잠긴 듯 고즈넉하다.

최근 몇 년간 복사꽃 필 무렵이면 날씨가 참 요란했다. 일껏 온화하다가도 이맘때면 별안간 비바람이 불거나 서리가 내려 꽃이 냉해를 입었다. 그것이 얼마나 두려운 일인지 겪어보지 않은 이는 짐작도 못 하리라. 다행히도 올해는 꽃 피우기 딱 좋은 화창한 날의 연속이었다. 속 시원하게 꽃이 활짝 핀 것도 고마운데 꿀벌까지 많이 날아들어 수정을 거든다. 날씨가 너무 좋아 벚꽃이 한꺼번에 우르르 피고 얼른 져버려 갈 곳 없는 벌들이 복사꽃으로 몰리지 않았을까 짐작한다. 상춘객들에게는 짧게 끝나버린 벚꽃이 아쉽겠지만, 농사꾼들은 어쩐지 올해 농사가 순조로울 것 같은 예감이 들어 즐거운 표정이다.

발걸음도 가볍게 복숭아밭으로 든다. 아직 낙화 전인 복사꽃을 찾아 분주한 날갯짓을 하는 벌들이 눈길을 끈다. 다섯 장의 함초롬한 꽃잎 속으로 몸을 집어넣어 꿀 따기에 열중인 벌. 벌이 복사꽃의 수정을 도와주고 꿀을 따는 것은 벌의 농사, 꽃이 피고 지고 열매 맺는 것은 나무의 농사, 나무가 살아가는 일을 통해 내가 살아가는 것은 나의 농사. 그러나 모두가 그러하듯 내 생에서 가장 귀한 농사는 자식 농사….

돌아보면 두 딸을 키우면서 나는 자주 울고 싶었다. 연년생 두 아이의 유아기 때는 농사일에 묻혀 제대로 돌보지 못했고, 학교에 다닐 때는 지독한 가난 때문에 다른 아이들은 누리는 보통의 것들을 해 주지 못했다. 사춘기를 지날 무렵에는 집안 분위기가 어두웠고, 성인이 될 무렵 어미아비가 기어코 갈라서고 말았다.

한 가정의 식구가 모두 흩어졌다. 큰딸은 직장 따라 지방으로, 작은딸은 공부하러 영국으로, 그리고 그는 그대로, 나는 나대로…. 마침내 터진 감정의 둑, 나는 두 달이나 밤이고 낮이고 매일 울었다. 내 안에 어쩜 그렇게 차고 넘치도록 많은 물이 갇혀있었던 걸까. 마르지도 않고 계속 눈물이 나왔다.

그리고 13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두 딸은 결혼 후 어미 옆에 나란히 집을 짓고 산다. 큰딸은 카페를 운영하고, 작은딸은 어미와 함께 농사를 짓는다. 하지만 두 딸은 일보다는 육아에 집중하는 편이다. 나도 딸들이 사는 방식이 마음에 든다. 복숭아농사도 키우는 시기마다 다른 기쁨이 있지 않던가. 이른 봄에는 올록볼록한 꽃눈 하나에도 열매를 떠올리며 설레고, 꽃이 필 때는 잠자던 감성이 피어올라 정신적인 풍요를 누리며, 잎이 트면 잎새마다 차곡차곡 희망을 쌓는 것이다.

그렇게 정성을 들인다고 기쁨만 누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겨울 혹한에 동해를 입기도 하고, 다 지은 농사 태풍에 만신창이가 될 때도 있다. 농사도 가능한 한 아픔을 줄이고 기쁨을 누리기 위해 정성을 들이거늘, 자식 키우는 일이야 오죽하랴. 혹시라도 있을 아픔을 막을 수 있는 길은 아이 키우는 일에 어미·아비가 집중하는 것이 최고의 예방책이 될 것이다. 반대로 자식 키우는 길목마다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는 행복을 놓치지 않고 누렸으면 하는 바람이다.

내가 과수원에 몰두하는 동안 두 딸은 정원 가꾸기에 몰두한다. 개화 시기가 다른 화초를 적절히 배치해 늘 꽃을 볼 수 있게 하고, 주변 나무와도 잘 어울리도록 균형을 이루어야 하니 여간 복잡한 설계가 아니다. 어린 것들이 아름다운 정원에서 뛰어놀 수 있도록 해 주고 싶은 모정, 그 마음은 자식을 잘 키울 수 있는 토양을 만드는 노력의 일부분이다.

정원에서는 두 딸 내외와 손녀 둘 까지 여섯 식구가 꽃을 심느라 왁자하다. 간혹 세 살짜리 손녀 하윤이가 우는가하면 일곱 살짜리 서연이의 환호 소리도 들린다. 사월 마지막 주일날 오후 저만치 과수원집 정원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봄날 새소리처럼 평화롭다.

내 어버이가 온전한 사랑으로 나를 키우셨듯 내가 내 자식을 키우고, 내 자식은 또 제 자식을 키우는 큰 사랑. 이렇게 우리는 대를 이어 가장 귀한 농사를 짓는다.

/이수안 한국농어촌여성문학회 전 편집장, 회장 역임, 문예운동 신인상, 한국포도회 이사, 향기로운포도원 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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