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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여담] 새해에 하는 김장김영희

[한국농어민신문]

겨울비가 내린 뒤라 도로의 응달진 곳은 온통 빙판이다. 너무 추워서 바쁠 것도 없는 밭일을 뒤로 하고 친구 집에 들렀다. 때마침 김장하느라 거실이 온통 난장판이다. 언제부턴가 주변에서는 겨울 김장을 한꺼번에 하지 않고 나눠서 하는 집이 늘고 있다. 짬짬이 혹은 두 번으로 나눠 담는 이유가 있다. 한꺼번에 하니 힘이 들기도 하고 일 년 먹을 김치가 들어갈 냉장고 공간 확보도 어렵다.

그 다음 이유가 중요하다. 11월에는 설 전까지 먹을 김치를 담그고, 양력 2월 전후에는 추운 겨울을 이겨낸 잎이 두꺼워진 월동배추로 가을배추가 나올 때까지의 김치는 담는다. 11월에 담은 것과 2월에 담은 김치는 맛에서 차이가 난다. 아무래도 오래 두고 먹을 김치는 월동배추로 담아야 제 맛이다. 친구가 장갑 낀 손으로 김치를 버무리다 쭉 찢어 내민다. 고춧가루가 옷에 묻을세라 고개만 쑥 들이밀고 입을 벌린다.

장난기 발동한 친구가 김치를 입으로 밀어 넣고는 재빨리 양념을 내 얼굴에  바른다.

“야! 우짤라꼬….”

“옷 벗고 장갑 끼고 김치나 치대라.”

입속으로 넣어진 김치를 씹으니 말보다 미소가 절로 지어진다. “맛나다!” 이 한마디에 친구는 흐뭇한 표정이다.

김치 빛깔이 맑고 선명한 붉은 색이다. 대부분 직접 가꾼 채소와 재료로 만들었기 때문일 것 같다. 입에 가득한 침을 삼키며 먹어본다. 역시 맛나다. 뒷맛이 개운하고 시원한 이 맛은 뭘까? 손가락으로 양념을 쿡 찍어 다시 먹어 본다. 맛의 비결이 궁금해진다. 푹 곤 호박과 찹쌀 풀물에 고춧가루를 풀었을 맛이 느껴진다. 또 김치를 씹어 본다. 멸치젓과 새우젓을 넣은 맛도 나지만 그것으로도 표현할 수 없는 맛이다. 눈에 보이는 재료는 쪽파, 미나리, 갓, 굴, 청각, 채 썬 무와 배 정도이고, 마늘과 생강 맛도 적당한 것 같다. 알 수 없는 뭔가의 재료가 더 첨가된 듯하다. 익숙한 맛이면서도 우리 집에서 찾을 수 없는 비법이 추가된 것이 분명하다.

전업주부로 강산이 변할 만큼 김장을 많이 해 본 경험으로도 추측해 낼 수 없는 이 맛의 비법이 궁금하다. 김치에 들어가는 재료는 아무리 간단히 해도 10가지가 넘는다. 양념 육수에 들어가는 것까지 일일이 다 말하자면 정말 많다. 그 비법은 어쩌면 친구에게만 있는 특별한 레시피가 아닐까. 요즘은 웬만한 요리에는 계량화 된 레시피가 있다. 친구는 요리할 때 재료를 계량하지 않고 적당히 넣는다. 간도 적당히, 고춧가루도 적당히, 절이고 끓이는 시간도 적당히…. 계량할 수 없는 ‘적당히’라는 이 레시피는 오랜 경험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아무나 할 수 없는 친구만의 비법인 것이다.

우리의 김장 문화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인이 주목하는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이 아니던가, 그것도 특정한 지역이나 사람이 아닌 우리나라 전체와 전 국민이 전수자가 되어 김장 문화를 계승하고 있는 중이기도 하다. 표준화 되지 않은 김치 맛의 비결은 어머니와 시어머니 그리고 집안 어른들을 통해 자식들에게 전승되기 때문이다.

김장이 힘들기는 하다. 어릴 때 본 김장은 며칠에 걸쳐 온 집안 식구들이 매달린다. 무 배추를 뽑아오고 시래기를 매달고 장독 묻을 곳에 땅을 파기도 한다. 배추를 양념에 버무릴 때도 바람 없는 날은 마당에 멍석을 깔고 그 위에 다시 짚을 깔거나 돗자리를 편다. 마당에는 장작불이 벌겋게 타고 있어서 언 손을 가끔 쬐기도 했다. 집마다 젓갈 거르는 냄새가 진동하던 때도 이때다. 핵가족제도로 사라지는 듯 했던 김장 문화가 김치냉장고 보급으로 다시 살아난 듯해서 좋다. 온가족이 김치통을 들고 시골로 모이는 새로운 풍경이 생긴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수고롭고 번거로움으로 인해서 특색 있는 김장이 많이 잊히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요즈음은 인터넷 검색으로 김치 담그는 방법이야 얼마든지 찾을 수 있지만, 각 가정의 손맛은 흉내 낼 수 없는 비법임에는 틀림이 없다. 아직은 부모님들이 해준 김장김치의 맛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다. 기억이 희미해지기 전에 다양한 김장김치 맛을 보존할 수 있어야 한다.

김장김치는 그 지역의 고유 상품이 될 수도 있다. 한 번 맛본 김장 맛을 잊지 못해 찾아오는 관광객도 있을 수 있다. 이제 어르신들만이 알고 있는 전통음식의 비법을 찾아 우리들이 배우고 익혀 다음 세대에게 물려줘야 한다.

친구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어느새 김치 통이 다 채워지고 쇼핑 팩에 선물처럼 김치가 넣어져 있다. 저녁상에 오를 색다른 김치 맛으로 벌써 부터 입가에 미소가 지어진다.

/김영희 98년 국제신문 논픽션 우수상, 한국농어촌여성문학회장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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