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효순

[한국농어민신문] 

고추나무가 물이 필요하다. 비가 너무 오랫동안 오지 않아서다. 애타는 마음이 어디 올해뿐이던가. 시들어가는 밭곡식들 보기가 애처롭다.

오래전 그해 여름에도 지독한 가뭄이 들었다. 관개수로가 잘 되어 있는 논은 그런대로 모내기가 끝났지만, 산밑 다랑이논은 벼가 시들시들 몸살을 앓았다. 물이 절실했다. 그날, 가뭄이 남편 탓도 아닌데 아버님은 이유 없이 불같은 화를 내셨다. 삼 일 전부터 웅덩이에 고인 물을 품어 올리고 물이 바닥나면 양수기를 껐다가 다시 물이 고이기를 기다리는 고된 작업을 하던 남편은 자정이 지나도 들어오지를 않았다.

꾸중을 듣던 그가 걱정되어 찾아 나섰다. 희미한 달빛에 개구리 울음소리만 가득할 뿐 여름밤 마을은 곤히 잠이 들었다. 우리 논은 동네를 벗어나 장정 키 두세 질 아래 조그만 냇가 징검다리를 건너서 산 밑에 자리 잡고 있다.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막 돌아설 찰나 하필이면 엊그제 죽은 젊은이의 무덤이 바로 옆에 있지 않은가. 내 몸의 세포란 세포는 모조리 머리털과 함께 하늘로 곤두섰다.

징검다리를 건너 돌계단을 올라 신작로에 다시 오르기까지는 어릴 때 늦은 밤 변소를 다녀오면서 토방에서 마루에 올라 방문을 열고 들어가기까지 무서웠던 그 무섬증 열 배를 더했다.  신발 한 짝은 징검다리를 건널 때 어디론가 벗겨졌지만 찾아오지 못했다. 그렇게 숨차게 뛰어서 마을 앞 경로 정까지 왔는데 어디선가 코를 고는 소리가 들렸다. 남편은 그곳에서 큰대자로 자고 있었다. 그냥 서러웠다. 

내 안에 갇혀있었던 서러움, 미움, 짜증이 한꺼번에 빗장을 풀었다. 마을 가까운 그곳에서는 싸울 수가 없어 동구 밖으로 나왔다. 영문을 몰라 속수무책 당하기만 하더니 드디어 그의 자존심도 으르렁거렸다. 우리가 서 있는 곳은 포풀러 나무가 있는 언덕이었다. 3~4미터 높이 아래 논은 모내기를 하기 위해 써레질이 되어 있었으며 수렁논이었다. 그는 힘껏 나를 언덕 아래 논으로 밀치고 사라졌다. 논에서 엉금엉금 기어 나왔을 때는 싸늘한 달빛만 가득할 뿐 개구리들이 내 꼴을 보고 더욱 개골거렸다. 어떻게 해야 할지, 어디로 가야 할지, 포풀러 나무 아래 앉아 수없이 묻고 또 물었다. 

새벽 별은 이미 희미해져 있고 조금만 더 있으면 논에 물꼬를 보러 나오는 마을 사람들과 마주할 터이다. 더구나 나머지 신발 한 짝도 없어졌다. 어쩌지 못하고 집으로 들어오는 신작로 길에 맨발의 진흙 자국이 어지럽게 따라왔다. 머리에서 발끝까지 완벽하게 진흙팩을 한  나! 그래도 그런 나를 알아보는 이들이 있었다. 마당에 들어서자 가슴까지 뛰어오르면서 왜 이런 모습이냐고 검둥이는 내 주위를 돌고 돌았다. 외양간의 소도 앞발을 꿇고 일어나 눈을 껌벅거렸다. 돼지 막에서 돼지도 꿀꿀거렸다. 짐승들과 맺은 인연도 이러한데 사람의 연은 쉽게 끊어내지 못하고 되돌이표를 찍는 거라고, 누구나 이렇게 사는 것이라고 안간힘을 썼다.

우물가에서 물을 끼얹었다. 몸에서 진흙들이 아우성을 치며 하수구로 빠져나갔다. 소용돌이 쳐진 마음도 따라 들어가기를 간절히 바랐다. 서너 평의 부엌으로 들어섰다. 어제저녁 정갈하게 씻어둔 살강에서 그릇들이 조심스럽게 나를 맞이했다. 보리쌀을 한 바가지 퍼다 확독에 넣고 갈았다. 절망, 미움, 서러움도 넣고 갈았다. 밥을 짓는데 덜 마른 축축한 보릿대가 연기가 났다. 그 연기가 매워 자꾸만 눈물이 나는것이라고. 아무것도 모르는 열두 식구는 맛있게들 아침밥을 먹었다.

남편의 눈빛이 내 등 뒤를 따갑게 따라다녔다. 옷자락 한 자락을 삐죽이 내보이며 술래잡기를 한 그는 한동안 술래가 될 것이다. 나는 당분간 꼭꼭 숨을 것이고. 밥그릇 속에 뚝 떨어지던 눈물 한 방울, 지금 생각하면 분명 진주였다. 얼마나 화려한 여름밤 외출이었던가. 젊음, 그것은 주체할 수 없는 혈기이기도 하고 고통이자 희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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