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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여담] 사월의 보쌈꾼

꽃의 계절이다. 길가의 벚나무는 하롱하롱 꽃비를 뿌리고, 우리 과수원의 복숭아나무는 여기저기서 연분홍 복사꽃을 팡팡 터트리기 시작했다. 겨우내 앙다물고 있던 꽃눈, 그 단단하고 건조하던 눈에서 이다지도 부드럽고 화사한 꽃이 피어나다니. 꽃잎은 만지기만 해도 손자국이 나버릴 것처럼 연한 모습이다.

함초롬한 이 꽃잎은 보는 이의 느낌보다 훨씬 강인하다. 다섯 장의 꽃잎 정중앙에는 한 개의 암술이 있고, 몸에 미세한 꽃가루를 묻힌 수술이 암술을 에워싸듯 오모르르 물려있다. 이 중요한 암·수술을 지난겨울의 강추위로부터 보호해 준 것은 놀랍게도 한 없이 여려 보이는 다섯 장의 이 꽃잎이다. 꽃잎은 겨우내 찬 기운이 범접하지 못하도록 암·수술을 꼭 껴안고 있었다. 햇볕이 따스해지고서야 굳게 포개고 있던 꽃잎을 스르르 풀어버린 것이다. 느슨해진 꽃잎은 부드러운 봄바람에 서서히 부풀더니 마침내 팝콘 터지듯 활짝 펴고 있다.

꽃이 피면 수술은 암술에 꽃가루를 잘 전해주며 수정에 전념한다. 배꼽이 오목하게 들어간 잘 생긴 복숭아를 만들기 위해서다. 마냥 수줍어 보이는 복사꽃이지만 의외로 부끄러움이 없다. 은밀하게 이루어질 것 같은 수정도 벌건 대낮에, 그것도 너무 덥지도 춥지도 않은 화창한 날에 한다.

개화기의 복사꽃을 잘 들여다보면 꼿꼿하던 암술이 힘없이 쓰러진 것이 보인다. 며칠이 지나 그 꽃의 씨방을 잡았을 때 야문 느낌이 들면 수정이 잘 되었다는 표징이다. 한 해 농사의 출발이 순조롭다.

그런데 복사꽃 만개 시점인 사월 하순의 날씨는 종잡을 수 없이 변화무쌍하다. 꽃샘추위에 서리가 오거나 더러 눈이 내리기도 한다. 날씨가 화창해도 수정이 잘 안 되는 품종이 있다. 모양은 번듯한데 수술에는 치명적 단점인 꽃가루가 너무도 적은 탓이다. 어쩌겠는가. 보쌈이라도 해 오는 수밖에.

오늘은 꽃가루 보쌈을 해 오는 날, 읍내 농협 농자재 판매소에는 이미 보쌈꾼들의 발걸음이 분주하다. 보온재 보따리에 고이 싸여 냉동실에서 나오는 것은 중국에서 보쌈해 온 꽃가루다. 꽃가루가 잠에서 깨어나기 전에 부리나케 집으로 와 다시 냉동실에 보관한다.

앞으로 대엿새쯤 뒤부터 사나흘 간 우리 과수원은 복사꽃 대궐이 될 것이다. 화창하다가도 금세 강풍이 불며 추워지는 것이 사월의 날씨 아니던가. 그 변덕스러운 날씨에 내 복숭아나무를 방치할 수는 없다. 나는 가장 화창한 날을 잘 고르는 큐피드가 되어 화살 대신 꽃가루를 순결한 복사꽃 위로 날리며 암·수술이 거사(巨事)를 잘 치르도록 도와줘야 한다.

보쌈꾼의 역할을 마친 뒤에는 복사꽃의 수정 과정을 지켜볼 생각이다. 신방을 엿보기 위해 문풍지를 찢을 것도 없다. 내놓고 거사(巨事)를 치르는 저들처럼 나도 복사꽃 만발한 과수원을 산책하며 콧노래를 짓궂게 흥얼거려도 좋겠지. 태풍이 오기 전의 고요처럼 본격적으로 바빠지기 전 과수원의 한유를 유유자적 즐기면서.
 

   
 

이수안
한국농어촌여성문학회 편집장, 회장 역임
한국포도회 이사
향기로운포도원 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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