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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여담] 얼떨결에 들어온 길이수안

가마솥 그득하게 은행을 안치고 장작불을 지핀다. 들깨 단에 불을 붙이고 그 위에 마른 가지를 얹어 아궁이를 충분히 데운다. 아궁이 주변으로 퍼지는 열기를 느끼며 조심조심 장작을 올린다. 불꽃은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타올라 순식간에 아궁이 밖으로까지 나와 춤을 춘다.

벌겋게 타오르는 불꽃을 바라보며 지난해 복숭아 농사를 돌아본다. 포도 농사를 짓다가 복숭아 농사로 바꾼 지 5년째다. 복숭아 농사 기술은 없었지만 열심히 공부해서 4년생이던 작년에 결실도 잘 되고 알 크기도 좋았다. 마치 저 아궁이의 불꽃처럼 매사 순조로울 것만 같았다. 수확기에 들자 가격 폭락으로 그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졌다. 전국적으로 복숭아 재배면적이 늘어 수확량이 폭증했다는 것이다.

나를 더 힘들게 한 것은 농약값이다. 포도 농사를 지을 때는 비가림시설 덕분에 일 년에 서너 번만 소독해도 되었다. 반면 노지에서 재배하는 복숭아 농사는 소독을 자주 해야 하는 것이 큰 문제로 떠올랐다. 농약사에서 권하는 약을 다 쓰다 보니 소독 한 번 하는데도 수십만 원이 들었다. 더구나 장마철에는 소독을 해도 치료가 잘 안 된다. 품종에 따라 이 약 저 약을 다 써 보아도 효험이 없어 실농했다는 소문도 들렸다. 내성이 생긴 건지 시판되는 농약으로 복숭아나무를 지키기에는 역부족으로 느껴진다. 어떻게 할 것인가.

그래서 찾은 길이 자연에 물어보는 것이다. 내 복숭아나무와 똑같이 장맛비를 맞는 저 산의 나무는 소독도 안 하는데 어째서 병에 걸리지도 않고, 동해 피해도 없으며, 벌레 피해도 적은 걸까. 돌봐주지 않아도 건강하게 자라는 자연 속의 나무, 나무들…. 어떻게 하면 내 복숭아나무도 저처럼 단단하게 키울 수 있을까. 나를 따라 하면 길이 보일 거라는 자연의 진중한 대답에 깨닫는다. 감기가 든 뒤에 약을 먹는 것보다 감기에 들지 않도록 체력을 기르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사람도, 땅도, 그리고 나무도….

나는 지금까지 온 길과는 다른 새로운 길에 발을 내디뎠다. 지난겨울 내내 자연의 농사법을 공부했고 틈틈이 친환경 농약도 만들었다. 한 해 동안 쓸 천연 농자재도 꼼꼼히 준비했고 필요한 시설도 보강했다. 이 길로 들었다고 이쪽 길만 고집하지도 않을 것이다. 하다가 안 되면 뒷걸음질도 하며 천천히 전진하다가, 땅과 나무와 내가 이 농사법에 익숙해지면 그때 이 길로 죽 가리라는 복안이다.

다섯 시간여 달인 은행 진액이 자줏빛으로 붉다. 이 정도의 농도면 올해 복숭아 농사에 쓸 살충제로 충분하겠다. 1억 년 전부터 살았으며 몇 번의 빙하시대를 겪으면서도 살아남은 은행나무. 그 강한 생명력이 올 농사에서 모든 벌레로부터 내 복숭아나무를 지켜줄 것이다.

비싼 농약 값 때문에 얼떨결에 시작된 친환경 농사의 길. 동기는 미미했으나 이왕에 든 길이니 지치지 않고 해 볼 참이다. 열심히 하다 보면 거창한 동기로 시작한 것 못지않은 좋은 결과가 나올지 누가 아는가.
 

   
 

이수안
한국농어촌여성문학회 편집장, 회장 역임
한국포도회 이사
향기로운포도원 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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