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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여담] 남편의 가을최승옥

[한국농어민신문]

굴착기 일을 하며 농사까지 짓는 남편은 늘 바쁘다. 남들은 한 가지 일도 벅차다는데, 두 가지 일을 하면서도 천성이 성실해 둘 다 잘해내는 편이다. 지난 계절 남편의 온갖 정성으로 이 가을 우리 밭은 땅속도 풍성하고, 땅 위에도 곡식들로 그득하다.

올해 남편은 들깨를 유난히 많이 심었다. 농사까지 잘 되어서 수확량도 기대보다 많이 나왔다. 들기름 넉넉히 둘러 좋아하는 파전도 자주 부처주고, 김치볶음도 자주 해줘야겠다.

제작년부터 농사짓기 시작한 이 밭은 사실 우리 땅이 아니다. 남편이 굴착기 일을 해 주었는데 밭주인이 품값 대신 묵정밭을 빌려주겠다고 했다. 그런데 집에서 먼 밭에 가는 것이 늘 문제였다. 나는 운전을 못 하는 데다 밭은 후미진 곳에 있어 차가 없으면 아예 드나들 수가 없다. 무엇보다 잡곡 농사는 처음이라 암담했고 꿈에도 생각해 본 적이 없어 고민이 많았다. 땅을 놀리자니 굴착기 수고비를 받지 못한 것이 속상하고, 무엇을 심으려니 걱정됐다.

몇 날 며칠 동안 미련을 떨치지 못했다. 고심하던 끝에 우선 들깨 모종부터 심어보기로 했다. 생각보다 처음 심은 들깨치고는 잘 자라주었다. 잎이 나폴 나폴 할 무렵부터는 깻잎의 모양새를 갖췄다. 바라만 봐도 예쁘고 신통했다.

이렇게 시작한 농사는 꽤 여러 작물을 심었다. 몸에 좋다는 서리태, 고구마, 땅콩, 메주콩, 처음으로 심어보는 참깨까지…. 봄부터 여름이 지나도록 땀 흘린 덕분에 가을에는 거둬들인 알곡으로 전문 농사꾼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우리 부부는 나름대로 재미 붙이며 열심히 농사짓고 있을 즈음이었다. 어느 날 새벽 서너 시경에 집 전화가 울렸다. 무슨 일인가 싶어 급히 받아 보니 다름 아닌 밭주인이다. 주인은 밭 가장자리까지 놀리지 말고 부지런히 움직여서 알뜰하게 심어 먹으라고 했다. 겨우 그 말을 하려고 곤히 자는 이 시간에 전화했단 말인가. 새벽 네 시쯤 전화를 받고 나니 황당하면서도 어이가 없었다. 더욱이 밭을 해 먹으라고 줬으면 그만이지 싶어서 속으로 투덜거렸다. 우리는 나름대로 묵정밭을 가꾸느라 애를 썼지만, 밭주인은 우리가 농사짓는 것이 답답했던 모양이다.

묵정밭은 몇 해 동안 손길이 닿지 않아 온통 잡초들로 광장을 이루었던 땅이다. 남편이 굴착기로 물고를 내고 둑을 만들어 다듬어 주면 나는 호미로 긁고 또 긁어내어 밭을 개간하다시피 했다. 열흘이 지나도록 풀을 뽑고 이랑을 타느라 밭에서 살아야만 했었다. 그리고는 들깨 모종을 심고부터 호수를 끌어 물을 주기 시작했다. 봄 가뭄에 배배 꼬이며 타들어 가는 모종을 살리려 많은 시간을 보내야 했다.

가뭄에 착 까부러져 있는 들깨에 물을 주고 나면 꼿꼿하게 일어서는 모습에 허리 아픈 것도 잊었다. 그렇게 일군 땅이 남편에게는 내 땅 만큼이나 애정이 생긴 걸까. 이제는 땅 주인이 새벽 전화도 안 하지만 빈자리 없이 무엇이든 심는다.

남편은 올해 밭둑에도 들깨 모를 심었다. 어디 밭둑뿐인가. 오밀조밀 구석진 자리마다 죄다 심고 또 심는다. 이제 그만 좀 심고, 되는 대로 먹자는 내 말에는 마이동풍이다. 속 터지는 내 쪽에서 도대체 왜 이리 들깨만 심어 대느냐고 하니, 들깨는 까다롭지도 않고 쑥쑥 자라는 모습이 신통하여 농사일이 힘들지 않다고 말한다. 그리고 잡풀이 많으면 지나가는 이웃 농부가 밭주인이 게을러서 헛농사 짓는다고 할까 봐 기를 쓰는 것이라고 했다. 남편은 복숭아 농사뿐만 아니라 전 품종의 농업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것만 같다.

어른들이 하는 말이 있다. 모든 작물은 주인 발소리를 들으며 자란다고. 그만큼 관심과 사랑을 주면 작물도 주인의 마음을 안다는 것일 게다. 어느 과수원에 가보면 잔잔한 음악을 들려주는 곳도 있다. 어디 작물뿐이겠는가. 사람, 동물, 작물…. 모든 생명은 사랑과 관심으로 더 건강해지지 않을까.

우리 밭은 내 발소리보다 농업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남편의 발걸음 소리를 더 좋아할 것 같다. 참깨, 고구마, 땅콩 등 참으로 실한 곡식들이 남편만 기다린다. 굴착기 일하는 참참이 이 곡식들을 수확하느라 남편의 가을이 유난히 바쁘다. 산과 들에 벌어진 저 단풍 잔치 한번 느긋하게 즐길 틈도 없이….

최승옥/문학미디어 등단, 한국농어촌여성문학회 회원, 음성문인협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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