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승옥

[한국농어민신문] 

냉동실 문을 열고 한참을 뒤적인다. 뭐가 이리도 많을까. 식탁 위에 냉동실 안의 봉지를 하나씩 다 꺼내놓은 뒤에 드디어 도토리 녹말가루 봉지를 찾았다. 큰 그릇에 물을 받아 봉지째 찬물에 담갔다. 녹말이 녹으려면 몇 시간을 기다려야 할 것 같다. 묵이 잘 쑤어지면 나누고 싶은 지인이 있다. 

지난가을에 남편과 함께 산에 올라 도토리를 주웠다. 산을 오르는 동안 숨이 차오르고 땀이 흘러 힘들었는데 노란 알 도토리를 보자 없던 힘이 솟아났다. 차오르는 숨을 고르고 도토리 줍기 삼매경에 빠졌다. 한참을 정신없이 줍다 보니 다람쥐와 청설모도 도토리를 거두어들이고 있었다. 언젠가 인터넷에서 본 기사가 떠올랐다. 등산객들이 도토리를 너무 많이 주워가버리는 바람에 다람쥐 먹을 양식이 모자란다는 내용이었다. 산짐승들 먹이 줍는 것이 미안해 그만두어야 하나 갈등하고 있는데 이제 내려가자는 남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람쥐 양식을 가로챈다는 미안함에 서둘러 하산한 날의 수확물로 만든 아주 특별한 도토리 녹말가루다. 

녹말가루가 잘 가라앉도록 기다린다. 서너 시간 뒤 웃물을 따라버리고 녹말과 물을 6대1로 개량한다. 냄비를 불 위에 올리고 나무 주걱으로 한쪽 방향으로 잘 저으며 묵을 쑨다. 왕소금도 적당히 넣어 뜸을 푹 들여 그릇에 담아 놓고 보니 흐뭇하다. 이만하면 잘 된 것 같아 엄지척 나 스스로 칭찬한다. 손가락으로 묵을 톡톡 건드려보니 야들야들 갈라지지도 않고 윤기가 자르르 흐른다.

하루가 지났다. 베란다에 놓았던 묵을 한 조각 잘라 입에 넣어보니 쫄깃쫄깃 하늘하늘 만족할 만한 맛이다. 옛날에 친정어머니가 만들어주신 바로 그 맛이다. 

도토리는 곡식과 과실의 좋은 점을 두루 갖추고 있어서 도토리만 먹어도 보신이 필요 없다고 한다. 그만큼 우리 몸에 좋은 효능을 골고루 가진 먹거리다. 특히 몸속에 독소를 빼주어 요즘같이 미세먼지가 심할 때 먹으면 건강을 지킬 수 있다. 무엇보다 저열량 음식이라 비만 체질 개선에 도움이 된다고 하니 몸이 둔한 나에게 안성맞춤이다.

지금은 도토리묵이 별미고 건강식으로 알려졌지만, 먹을 것이 귀했던 시절에는 한 끼의 식사 대용으로 여겼다고 한다. 겉껍질을 벗긴 도토리를 물에 불려 돌절구로 빻아 속껍질을 분리해 속살만 가마솥에 넣고 끓인다. 이렇게 해서 먹기도 하고, 말렸다가 부침개와 묵말랭이도 해 먹었다. 헐벗고 굶주렸던 한국전쟁 기간에는 헐벗고 굶주린 많은 사람이 도토리로 연명하기도 했다니 얼마나 고마운 먹거리인가.

“참나무는 들녘을 바라보며 열매 맺는단다.” 

친정어머니는 그렇게 말씀하셨다. 참나무는 풍년이 들면 도토리 열매를 조금 맺히게 하고, 흉년이 들면 열매를 많이 맺어 사람들의 주린 배를 채워주었다는 것이다.

지금은 너나없이 배가 불러 탈인 시대다. 오래전, 허기진 이들의 배를 채워주던 도토리묵. 그러나 오늘 나는 툭하면 배부르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지인과 도토리묵을 나누기 위해 집을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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