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안

첫눈 내리는 날 밤의 기차여행이 깊은 잠에 빠진 감성을 흔들어 깨운다. 가로등 불빛 아래로 내려앉는 눈을 바라보는 풍경이 낭만적이다. 세상 복잡한 일 잠시 잊고 쏟아지는 저 눈 속을 마냥 떠나도 좋을 것 같다. 상상의 세계를 유영하는 자유로운 영혼을 깨운 것은 안내방송이다. “잠시 후 우리 열차는 음성역에서 정차합니다. 음성역에서 내리실 손님 안녕히 가십시오.”

그 소리에 후드득 정신을 차리고 주섬주섬 내릴 채비를 한다. 그런데 맙소사. 음성역에 내리자 열차 안에서의 그 넘치던 감성이 순식간에 두려움으로 바뀌고 만다. 발등이 잠길 정도로 내린 눈을 본 순간 정신이 번쩍 든 것이다. 눈길에 취약한 1톤 트럭으로 집에 무사히 갈 수 있을까. 불길한 예감이 들면 멈춰야 하는데, 내 몸은 유체이탈을 한 사람처럼 트럭에 올라 운전대를 잡고 만다.

역시나 내 차는 힘을 못 쓰고 쩔쩔맨다. 몇 번의 시도에도 슬금슬금 미끄러지더니 기어이 주차해 둔 남의 승용차에 가 닿아버린다. 조심조심 오라고 큰아이, 작은아이가 차례로 보낸 문자를 확인했었다. 그때 택시로 귀가하는 쪽으로 결정했어야 마땅하다. 그런데 일을 저지르고 말았으니 어떻게 할 것인가. 피해 차에 메모를 남기고, 보험회사에 사고 접수를 하고, 레커차가 와서 옆 차에 붙은 트럭을 떼어내고…. 그리고 택시로 귀갓길에 올랐다.

열 시간 같은 한 시간을 추위와 불안 속에 떨어본 사람이라면 짐작할 수 있으리라. 이 엄청난 눈길에도 달려와 준 기사님이 얼마나 고마운지. 그런데 가섭산 기슭에 자리 잡은 우리 동네, 그 오르막길을 무사히 올라갈 수 있을까. “기사님. 걸어갈 테니 동네 입구에서 세워 주세요.”  “걱정하지 마세요. 문제없습니다.”

꼬부랑길, 좁은 길, 오르막길…. 음성 지역 구석구석을 누비며 산전수전 다 겪었음 직한 백전노장 기사님이 동네 길을 거침없이 전진한다.

완만한 S자 길을 지나자 저 멀리 가로등 불빛 아래 움직이는 물체들이 보인다. 자세히 보니 세상에나! 눈 내리는 날 밤 강추위에 웬 사람들이 도로의 눈을 치우고 있지 않은가. 도착해서 보니 뜻밖에도 내 식구들이 눈을 치우고 있다. 사위와 딸 그리고 열 살 손녀까지 모두 나와 웃고 떠들며 눈 축제를 즐기는 분위기다.

여기 2차선 도로는 25° 정도의 경사길이다. 바로 치우지 않으면 오고 가는 차바퀴에 눌린 눈이 밤사이 빙판이 되고, 그 얼음이 녹을 때까지 출퇴근길이 곤란할 테니 이리 나선 모양이다. 어쩌면 어미가 힘 못 쓰는 1톤 트럭을 끌고 오다 미끄러질까 염려되어 시작한 일인지도 모른다.

기사님을 보내드리고 잔디밭을 둘러보니 여기는 또 딴 세상이다. 북극에나 있을 법한 이글루가 정원 중간에 우뚝하고, 그 옆에는 듬직한 눈사람이 수문장처럼 서서 신축 건물을 지키고 있다. 이글루에는 열 살 손녀가 들락날락하기 좋을 만치 그럴싸하게 입구도 잘 내어놓았다. 이 그림을 만든 아이들의 시간이 눈에 선하다. 제 어미·아비와 함께 어지간히도 깔깔깔 웃어댔을 손녀의 행복을 상상하며 나도 웃는다.

거실에 가방을 던져두고 종종걸음으로 아이들 있는 도로로 향한다. 오르막길 9부쯤에 좀 전에는 없던 승용차 한 대가 떡하니 서 있다. 나 좋자고 하는 일일 텐데, 위쪽 전원마을에 사는 이가 고맙다 인사하려고 멈췄다가 못 올라가고 애를 먹는 중이다. 다시 저 아래까지 내려갔다가 탄력을 받아 올라가며 창문으로 기어이 인사를 하고 부르릉 지나간다.

함박눈 펑펑 쏟아지는 밤, 가로등 불빛 아래에 눈 치우기에 신난 아이들을 바라보며 생각한다. ‘음성역에서 일으킨 사고에 대해서는 입도 뻥끗 말아야지. 첫눈 내리는 날 밤의 낭만을 즐길 줄 아는 예쁜 내 새끼들….’ 오늘은 내 마음에 감성과 이성이 번갈아
자리바꿈하고 있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한국농어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