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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女담] 농부와 아들박래녀
   

칡꽃이 피었다. 사방을 휘감아 오른 칡넝쿨이다. 처서가 지났지만 한여름을 방불케 한다. 오늘도 부자는 땀 목욕을 한다. 단감작업장을 다시 짓는 일이다. 농촌에서는 허드렛일만 해도 하루가 금세 간다. 죽을 것 같다하면서도 일손을 놓으면 살맛이 없다는 농부다. 농부는 아들을 데리고 창고를 치운다.

두 사람이 창고 치우는 일을 하는 동안 나도 일감을 찾는다. 청소를 하고 텃밭의 끝고추와 고춧잎을 딴다. 호박잎도 따고 가지도 딴다. 울타리를 감아 오른 호박넝쿨에도 애호박이 생긋거린다. 아무리 폭염과 폭우가 기승을 부려도 계절은 어김없이 가을로 치닫는다. 어느 곳에서든지 주인이 되라는 임제 스님의 말씀이 가슴에 담긴다. 내가 자리 잡은 곳에서 혼신의 힘을 다하라는 뜻이리라. 과거나 미래에 연연하지 않고 현재에 발붙이라는 뜻이리라.

모든 것은 인연에 의해 생성되고, 인연에 의해 소멸된다는 아함경의 한 구절도 마음이 닿는다. 무비스님이 해설한 책인데 열반송이나 경전의 한 꼭지가 참 마음을 일으킨다. “이상하게 경계가 없어지는 것 같아.” 부자에게 한 마디 했다가 해탈한 척 하지 말라는 핀잔을 들었다. 우스개로 한 말이지만 농촌에 인이 박히다보니 진짜 사는 일에 경계가 없어지는 것 같다. 땀 목욕을 해도 개운하고 빈둥거리며 놀아도 개운하다.

온종일 중노동을 한 아들이 피곤한 기색이다. “힘들지?”하고 물으면 “아니, 아버지도 하는 일인데 젊은 내가 뭐가 힘들겠어요. 서툴러서 아버지 보기 미안해서 그렇지”라고 대답한다. 참 정성스러운 대답이다. 늙어가는 아비가 자기보다 더 힘들게 일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마음이 된 모양이다. 옛날부터 농촌의 가난한 부모는 자식에게 가난을 대물림하기 싫어서 공부하라고 닦달했다. 공부해서 도시로 나가 펜대 굴리며 편하게 살라고. 부모가 자식 위하는 마음이고 가난을 대물림하기 싫은 마음이다. 부모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지 않을까.

그 옛날 농촌총각에게 시집간다고 했을 때 엄마는 울었다. 엄마는 “우리가 고생고생하며 너를 공부 시킨 것은 편하게 잘 살라는 뜻인데 공직까지 포기하고 농사꾼 아낙으로 살겠다니 공부 시킨 것이 억울하다”라고 했다. 농사짓는 것이 편한 줄 아느냐고. 시부모 시집살이는 또 어떻게 견뎌 낼 거냐며 울었다. 공직에 있으면 노후가 편할 것이고, 못 사는 친정을 도울 수도 있는데 다 팽개치고 농사꾼 남편 따라 시골로 들어간다고 얼마나 애통해 하셨는지.

그러구러 세월이 흘렀다. 우여곡절도 많고 눈물도 많았고, 후회도 했지만 이제 그런 것들이 과거사에 머문다. 아비 덩치보다 큰 아들은 아비 대신 힘든 일을 척척 해 준다. 농사꾼 부모를 자랑스러워하는 두 아이다. 땀은 부자가 흘리는데 종종걸음 치는 내가 더 고단하다. 마음 씀이 고운 아들은 집에 오자마자 작업복으로 갈아입었다. 아비의 심부름꾼 노릇을 톡톡히 한다. 고등학교 들어가면서 바깥 생활을 했던 아들이다. 군대 다녀오고, 대학원에 다니면서 여태 객지 생활을 했다. 농사꾼 아들답게 집에만 오면 일꾼이 된다.

아들은 어릴 때부터 남편의 농사일을 도왔다. 촌아이가 농사에 대해 모른다면 부모 잘못이라는 남편이었다. 목수 일을 할 때는 연장가방 허리에 둘러 데리고 다니고, 경운기로 밭 갈기, 이앙기, 예취기 등, 논밭 일을 할 때도 데리고 다녔다. 딸은 곱게 키우고 아들은 억척스럽게 부려 먹었다. 배워서 남 안 준다고 농사꾼 아들이니 농사에 대해 알아야 한다는 것이 남편의 취지였다. 아들은 힘들어도 짜증내지 않는다. 마음이 넓다. 다른 사람 힘든 것을 못 보니 내가 힘들다고 농담도 한다. 요즘 세상은 이기적이 되지 않으면 살아낼 수 없다지만 사람의 심성은 타고 나는 것이 아닐까.

고단한 노동을 마치고 땀에 전 몸을 수영장에 가서 푸는 일도 즐겁다. 아들과 함께 하기 때문이리라. 좌청룡 우백호를 거느리고 온다고 농담을 하는 아저씨도 있다. 산과 들을 벗 삼아 사는 사람에게 좌청룡 우백호가 없으면 무슨 재미냐고 받아치지만 기분은 한껏 치솟는다. 어디선가 칡꽃 향기가 사르르 퍼진다. 얽히고설킨 칡넝쿨처럼 농부의 인생도 칡넝쿨과 닮았다. 하늘로 솟은 탑 모양의 자줏빛 칡꽃이 아름다운 것도 농부와 아들을 닮아서 아닐까.

/박래녀
MBC 전원생활체험수기공모 대상 수상
농민신문 신춘문예 중편소설 당선
제 8회 여수해양 문학상 소설부문 대상 수상
현대시문학 시 등단
수필집 <푸름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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