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윤경

[한국농어민신문]

남편에게 방앗간에 가서 벼를 찧어오라고 부탁했다. 농장직원들 식량까지 20kg 쌀 열두 포대 정도, 찹쌀 네 포대를 가져와야 한다며 못을 박았다. 나는 곧장 마트로 갔다. 소금 세 자루, 누룽지, 미숫가루, 물, 휴지, 비상약 등을 재난지원금 카드로 결제한 후 물건을 싣고 와 창고에 들였다. 재난에 대비한 비상식량이다.

코로나 19의 여파로 세계가 경제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인도를 비롯해 중동에서는 많은 이들이 일자리를 잃었고 길을 통제한 도시도 많다. 마스크가 귀해 아무 천이나 입을 가리고 있는 모습이 뉴스에 나온다. 기차도 버스도 탈 수가 없어 걸어 걸어서 고향으로 가는 사람들, 어느 나라는 골목까지 막아버렸다. 갇힌 주민은 최소한의 식량을 달라며 애걸하지만, 총을 들고 골목을 지키고 있는 군인들은 외면할 뿐이다.

코로나 19의 방역 관리가 세계 최고라고 손꼽히는 우리도 경제가 위축되기는 마찬가지다. 수출에 의존하던 기업이 큰 고초를 겪고 있다는 소식과 함께 직장을 잃거나 상권까지 무너질 지경에 이르렀다. 농촌에까지 급식으로 나가야 할 채소가 출하하지 못해 갈아엎는 곳이 많다. 급기야 정부는 내수 경기를 회복하자는 대안으로 사상 최초 국민에게 가구당 재난지원금을 지급했다.

100만원의 금액이 카드로 들어온 날 기분이 묘했다. 처음 정부가 긴급대책을 발표했을 때 나는 반대했다. 빚이라면 질색이다. 빚은 갚지 못하면 이자에 이자가 늘어나는 법이다. 개인 빚도 무서울 판에 나랏빚이 늘어나는 건 내 자식들이 두고두고 갚아야 하는 짐이 된다. 그런데 막상 지원금을 받고 나니 걱정은 한순간에 사라지고 마음이 편안해지는 건 웬 조화인가.

카드를 쓰기 전, 이미 지원금을 쓰고 있다는 몇몇 지인에게 어디에 썼는지 물어보았다. 대부분 먼저 고기를 사 먹었다고 했다. 특히 온 가족이 모여 소고기를 먹었다는데 그렇게 마음 편안하게 맛을 본 적이 없다고 했다. 아! 그제야 모든 고기값이 오른 이유를 알게 됐다.

지난해 겨울방학이 시작되자마자 돼지 가격이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다. 해마다 방학이 되면 불고기용 부위 고기의 판로가 막혀 농가마다 애를 먹는다. 학교가 개학을 하거나 가정의 달 5월부터는 풀리곤 했었는데, 듣도 보도 못한 신종질병의 여파에 축산업도 직격타를 입었다. 다시는 회복될 것 같지 않던 고기값이 얼마 전부터 오른 까닭은 이 재난지원금 덕분이었던 게다.

나도 아들네 식구를 불러 당당하게 한우직판장으로 향했다. 1등급 한우를 사들고 식당으로 올라갔다. 식당은 가족 단위의 손님들로 북적북적하다. 식당 주인은 요즘만 같으면 직원들과 함께 살아갈 수 있을 것 같다며 환한 미소로 맞는다. 고기가 입안에서 살살 녹는다. 피땀 흘려 벌어다 준 남편의 돈이 아니라서 일까. 비싼 한우고기를 먹는데도 마음이 편안하다.

소화도 시킬 겸 뒷짐 쥐며 읍내로 들어선다. 신나는 음악을 틀어 놓은 몇몇 상가는 학생들 상대로 장사하는 화장품과 음료 판매장이다. 또래끼리 이것저것 만져보고 웃고 떠들며 물건을 고른다. 옷가게도 신발가게도 미용실까지 손님이 많다. 사람이 사람을 만나 어우러지는 소리, 가게가 북적이는 시장의 모습이 며칠 전과는 딴판이다. 코로나 19가 언제 왔었냐는 듯 우리 외에도 느긋하게 걷는 이들이 많다. 활기가 넘치는 거리, 대부분 손에는 물건을 산 봉투가 들려있다.

호들갑을 떨며 비상식량을 생각한 건 어린 시절 어머니나 할머니의 알뜰한 절미 저축이 생각나서다. 두 분은 밥을 짓기 전 부뚜막 한쪽에 있는 작은 단지에다 보리, 수수, 조 등을 한 줌씩 덜어 저축했다. 저축한 식량은 손님이 올 때 밥을 하기도 했고 보따리장수가 올 때 물건으로 맞바꾸기도 했다. 어머니와 할머니가 절미 저축을 하게 된 건 아마도 감자를 캐기 전까지, 주린 배를 채우기 어려웠던 보릿고개 시절을 겪어보셨기에 미리미리 저축한 지혜일 것이다.

총예산 약 14조3000억원, 사상 최초로 국민에게 가구당 재난지원금을 지급하겠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그 돈을 쌓아본다면 우리 집채만큼 할지 궁금했다. 많은 돈을 본 적도 없지만, 돈을 받게 되더라도 순간에 쓰고 나면 그뿐일 거라고만 단정했다. 그런데 예측도 못 했던 시장경기는 확 달랐다. 돈이란 돌고 돈다는 어른들의 말처럼 우리가 사료값을 갚아 축산업계가 살아나듯 또 다른 직업들도 생기를 얻었을 것이다. 주먹구구식의 아녀자는 창고에 비상식량이 쌓여 좋고, 세상 돌아가는 이치까지 알게 해준 국민 재난지원금이 고맙다.

/박윤경 문예한국등단, 진천문인협회 회원, 대소창작교실 회원, 한국농어촌여성문학회 회장 역임, 수필집 ‘멍석 까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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