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평영

[한국농어민신문] 

자작나무가 보고 싶다는 언니와의 데이트가 있는 날이다. 외출 준비를 하는데 갑자기 눈이 흩날리기 시작한다. 알콩달콩 언니와의 밀애를 질투라도 하는 것일까. 약속 장소에서 언니와 만났는데 날씨는 점점 더 사나워진다. 눈길 운전의 위험 때문에 가까운 곳에 자작나무 숲이 있는지 검색해 본다. ‘꿩 대신 닭’이라고 했던가. 청주에서 가까운 상당산성 옛길에 자작나무 쉼터가 나온다.

산성 가는 길 입구에 도착할 무렵 휘몰아치던 눈보라도 그치고 세상은 온통 백설로 가득하다. 나뭇가지마다 눈꽃이 피고 바람이 불 때마다 흩날리는 하얀 가루는 자연이 만들어낸 훌륭한 무대가 되었다. 우리는 그동안 마음속에 고였던 찌꺼기를 날려 보내며 곧 만나게 될 자작나무 숲을 향하여 발걸음을 옮긴다.

숲은 하얀 눈옷을 입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우리를 반긴다. 많이도 적지도 않게 내린 눈은 엽서에 그려져 있는 설경을 그대로 옮겨다 놓은 것처럼 멋이 있다. 뜻하지 않은 선물에 갑자기 가슴이 뛴다. 꿩 대신 닭을 찾아온 길에 꿩이 기다리고 있을 줄이야. 행운이란 이렇게 슬그머니 계획 없이 오는가 보다. 

커다란 소나무 기둥을 끌어안고 하늘을 올려다본다. 거짓말처럼 잿빛 하늘이 걷히고 따스한 햇살을 곱게 비추고 있다.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파란 하늘과 흰 구름의 조화가 마치 마술 같다. 어떤 말로도 설명할 수 없는 자연의 신비 앞에 겸허히 고개 숙인다.

언니와 나는 상당산성 옛길을 찾은 목적도 잊은 채, 오로지 눈에 보이는 상고대와 맑고 푸른 하늘의 경치에 취해 걷는다. 바람이 불 때마다 날리는 눈가루는 여전히 우리 둘을 위한 배경이 되고, 숲속의 무대 위에 주인공이 된 우리는 자연과 하나가 된다. 역시 사람은 자연의 품에 안길 때가 가장 편안하다는 것을 가슴으로 느끼는 순간이다.       

산 중턱에 이르러서야 ‘자작나무 쉼터’라는 푯말을 발견한다. 그런데 심은 지 얼마 안 되어 보이는 아기 자작나무가 막대기에 묶여 보호받고 있다. 큰 나무가 있을 거라는 기대에 조금은 실망했지만, 어린나무도 나름 보기 좋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 하지 않던가. 비록 나무는 어리지만, 텔레비전에서 보았던 강원도 인제의 자작나무 숲이나 백두산 여행 때 하얗게 빛나던 자작나무 숲으로 상상한다.

자작나무가 보고 싶다던 언니도 처음엔 실망하는 눈치였지만, 언니만의 자작나무에 대한 추억이 있는 듯 사랑하는 연인인 양 어린나무를 쓰다듬으며 좋아한다. 그리고 아쉬움을 달래듯 자작나무 옆에서 카메라를 응시한다. 하얀 옷을 입은 언니의 모습이 자작나무와 잘 어울린다.

우리는 아쉬운 마음으로 오르던 길을 되돌아 내려간다. 눈 밟는 소리가 ‘뽀드득뽀드득’ 경쾌하다. 사열하듯 서 있는 나무들의 작별 인사를 받으며 좀 더 편하게 길을 걷는다. 오를 때 보지 못했던 풍경이 발목을 잡는다. 방울방울 햇볕을 먹은 눈이 빚어낸 보석이 나뭇가지에 맺혀있다. 어떤 보석이 이처럼 아름다울까. 

살다 보면 오늘같이 선물 받은 것처럼 행복한 시간을 보낼 때가 있다. 예고 없이 영화를 보자는 친구의 전화 한 통화는 내 가슴을 뛰게 하고, 밥을 먹자는 옆집 언니의 연락은 금방 얼굴에 생기를 돌게 한다. 영화를 보는 것, 밥을 먹는 것, 행복이란 얼마나 단순하고 소박한 것인지 다시금 느낀다.

산에서 내려와 뒤를 돌아보니 여전히 아름다운 눈꽃을 자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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