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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여담] 시대에 발맞추기

[한국농어민신문]

황금돼지해의 설 연휴 마지막 날이다. 손자를 비롯해 자식들과 시동생 식구들이 떠나고 나니 멍해진다. 손자의 목소리를 닮은 밝은 햇살이 거실 창가에 기댄 내 어깨를 감싸 안는다.

명절 음식 준비에 기운이 쏙 빠졌나 싶어 생각해보니 그것도 아니다.올해부터는 이제까지 해왔던 제사음식의 가짓수를 줄였다. 전 종류는 전문집에 맞췄다. 흰떡은 한 말만 빼서 먹을 만큼만 썰고 긴 가래떡은 농장직원들 먹게 돌렸다. 만두도 절반으로 줄였고, 제사상에 단골로 올랐던 과자와 나물도 뺐으며, 다른 음식도 먹을 만큼씩만 했다. 동서의 알뜰한 계산 덕에 떡국 국물까지 남기지 않았다.

우리의 고유 명절을 아예 외면하려는 것이 아니다. 며느리를 위해서도, 점점 몸이 약해지는 나를 위해서도 결단을 내려야했다. 무엇보다 남아도는 음식이나 제상 준비 후 버려지는 쓰레기를 조금이나마 줄이고 싶은 생각도 들어서다. 그렇게 음식 만드는 양을 줄인 만큼 몸은 덜 고단했다.우리 집은 십여 년 전부터 기제사를 한 번에 모신다. 한식이 지난 그다음 주 토요일 날 밤에 조상님 제사를 지내고 있다. 예전 같으면 어젯밤도 할아버지 기제사 준비에 바빴을 게다. 그렇게 결론이 나기까지는 시어머님과 의견충돌이 컸다.

조상 대대로 모셔왔던 기제사를 한 번으로 줄이자는 며느리가 미워 거센 말씀도 서슴지 않으셨다. 샤머니즘을 가까이하는 어머님이 민간의식을 거슬러 혹여 후탈이 있지 않을까 두려워하시는 마음 모르지 않았지만 며느리 입장에서 야속할 따름이었다.그렇다고 앞으로 신세대의 며느리들이 그 잦은 제사를 다 지낼 것인지는 장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제사 문제로 가정파탄이 일어나는 일이 빈번한 세상 아닌가. 우리 집도 시대에 발맞춰 살아야 할 것 같아 어머님과 긴긴 줄다리기에 들어갔다. 11년을 넘게 명절 때만 되면 나는 줄기차게 제사를 줄여야 한다고 주장했다.그사이 허리가 굽고 지팡이를 짚은 시어머님은 대종손의 손자며느리를 보고 싶어 결국 승낙하셨다. 시어머님의 허락에 감사하기도 하고, 조상님께 송구하기도 하여 명절 음식만큼은 옛 방식을 따르려 했다. 하지만 이제는 줄일 때가 된 듯싶다.명절이란 조상님께 음식을 바쳐 예를 올리는 것보다, 모처럼 가족이 함께 모여 뿌리를 확인하는 것이 더 뜻깊다고 본다. 손주의 재롱을 보며 자식들과 함께 남편을 태어나게 해 준 부모, 또 그 위 부모를 생각하며 이야기를 들려주는 자리, 서로 화기애애한 명절이면 흡족하다. 고유방식만 주장하게 되면 초고속의 시대에 맞지 않는다.

이제까지 여성들의 노고가 너무도 컸다. 그러나 이제 시대는 이미 여성 위주로 흘러가는데 옛 방식을 주장하다 보면 주부들의 볼멘소리를 무슨 논리로 잠재울 것인가.해마다 명절 증후군이 커져만 간다. 이번 명절에도 명절증후군을 소재로 쓴 기사가 인터넷 첫 창에 떴다. 직장에서 어느 정도 인정받는 두 여성이 시댁의 제사 때문에 며느리이기를 포기한다고 선언했다는 내용이다. 마음이 어수선했다.되짚어 보면 시골 마을에서 그것도 동리 결혼한 내가 기제사를 한 번에 모시겠다고 했을 당시 시어머님은 몸져누우셨다. 만약 내 며느리가 저 여성들처럼 제사 때문에 며느리이기를 포기한다고 외친다면 나는 마음을 크게 다쳤을 것이다. 문밖으로 새어 나오던 시어머니의 그 신음처럼 나 역시 몸져누워 속앓이를 할 게 뻔하다.누가 옳고 그르다는 판단하기 어렵지만, 시대가 흐르는 대로 따라가는 것이 맞다고 본다.

인터넷 기사에서 며느리이기를 포기했다던 두 여성은 이번 명절을 행복하게 보냈을까. 시어른과 좀 더 시간을 두고 대화하며 해결점을 찾았는지 궁금하고 아쉬움이 남는다.커피믹스 한 잔을 마시며 생각에 잠긴다. 며느리로 살 때 그렇게도 많은 음식 만들기를 강요하시던 어머님이 야속하던 나. 이제는 시어머니라는 위치에서 잘하고 있는 것인지 선뜻 답이 나오질 않는다. 다만 황금돼지해의 구정을 어긋나지 않고 오순도순 잘 지냈다는 것에 감사할 뿐이다.

/박윤경 문예한국등단, 진천문인협회 회원, 대소창작교실 회원, 한국농어촌여성문학회 회장 역임, 수필집 ‘멍석 까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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