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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여담] 금빛 억새꽃 내 큰언니이수안

[한국농어민신문]

한 해의 마지막 달, 각양각색의 불꽃으로 타오르며 많은 이야기를 낳던 단풍도 지고 한적해진 풍경 속 고속도로를 달린다. 꽃도 열매도 단풍도 가고 없는 무채색 풍경, 저물녘이 가까워져 오자 차창 밖은 고즈넉하다 못해 쓸쓸한 분위기마저 자아낸다.

그런데 산모퉁이를 돌아가느라 방향이 바뀌면서 나는 문득 새로운 사실을 깨닫는다. 저 앞 둔덕에 홀연히 나타난 억새밭을 보자 지금도 꽃의 계절이라는 것을. 조금 전까지도 쓸쓸해 보인 억새가 별안간 꽃으로 보인 까닭은 무엇일까.

햇살 때문이었다. 북향으로 운전하다가 산모퉁이를 돌며 서향으로 바뀌자 서쪽 하늘에서 내려온 햇살이 억새꽃 무리를 어루만지고 있었다. 햇살이 쓰다듬자 새하얗던 억새가 금가루를 뿌린 것처럼 과하지 않은 화려함으로 특별한 아름다움을 수놓고 있지 않은가.

금빛 찬란한 억새꽃밭 옆을 지나면서 나는 큰언니를 생각한다. 이제 꽃의 계절은 끝났다고 생각할 즈음에 자신의 삶을 가장 아름답게 가꾸고 있는 내 큰언니를. 밭둑이나 산기슭 또는 둔덕처럼 척박한 땅에 뿌리내리는 억새, 그 어떤 바람에도 허리 곧추세우며 꺾이지 않는 당당함, 단 한 점 자식 생각하며 모든 어려움에 등 돌리지 않고 정면으로 맞선 강한 모성, 너무나도 건강한 생각으로 노년을 아름답게 보내는 사람이 내 큰언니다.

큰언니는 일곱 남매 중 맏딸이다. 두세 살 터울로 태어나는 동생들 다 업어 키우느라 학교는 출석일보다 결석일이 많았지만 당연한 줄 알았다. 커서는 어머니를 도와 길쌈도 했고, 솜씨가 좋아 동생들 옷도 재봉틀로 직접 만들어서 해 입혔으니 부모님께 힘이 되어드리는 든든한 살림 밑천이었다. 나는 아직도 기억난다. 쇠죽솥 욕조에 내 몸을 담그고 묵은 때를 밀어주던 큰언니, 분홍색 동그라미 무늬가 있는 포플린 천으로 블라우스를 만들어 나와 두 살 위 언니에게 쌍둥이처럼 입혀주던 큰언니의 그 손길이.

큰언니는 막내가 세 살 때 멋쟁이 형부를 만나 결혼했으나 처녀 시절 보다 행복해 보이지는 않았다. 밖으로 도는 형부의 마음을 잡으려 갖은 노력을 했지만 허사였다. 채소, 연탄, 쌀 등을 파는 가계를 하며 젊은 시절을 동동거리며 보냈다. 그러나 형부 마음이 밖에 있으니 살림은 더 어려워졌다.

그 와중에 고등학생이던 조카의 건강에 이상이 왔다. B형 급성간염. 너무나도 급작스럽게 들이닥친 증세는 충격적이었다. 건강하던 아이가 갑자기 계단을 못 오르더니 방문 여는 것까지도 힘겨울 정도로 체력이 떨어졌다. 언니는 형부가 밖으로 도는 것 따위는 상관없어졌다. 아이만 건강해진다면 그 어떤 어려움도 감수할 수 있었다.

조카는 일 년 이상 학교에도 못 가고 치료에 매진했지만, 병원과 집에서 틈틈이 공부했다. 덕분에 친구들과 나란히 대학 시험을 보았다. 의대 가려던 목표를 낮추어 공대에 진학해 공학도의 길을 걷게 되었다. 장학금으로 대학 공부를 해 늘 쪼들리는 언니의 부담을 덜어주었다. 그렇게 청소년기를 보낸 조카가 지금은 참한 여인의 남편으로, 두 딸의 아버지로, H 그룹의 상무이사로 중책을 잘해나가고 있다.

입이 무겁고 진중한 조카는 전화를 잘 안 하는 편이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려니 하고 사는 언니였는데 아주 오랜만에 전화를 받았다.

“엄마…”

“그래, 우짠 일이고, 전화를 다하고.”

“……”

 “야야, 니 우나? 무슨 일이고?” 

“엄마 아들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아? 오만 명의 직원을 이끄는 사람이야. 엄마 아들이…”

이제는 걱정이라고는 없을 것 같은데도 언니는 아직도 걱정거리가 있다. 장정 없이 농사짓는 나 때문이다. 복숭아밭이 바쁠 때면 언니는 대구에서 음성까지 노인 우대요금 열차를 타고 기꺼이 올라온다. 갖가지 밑반찬도 해 나르고 과수원 일도 열심히 도와준다.

내가 안 바쁜 철이 되면 언니는 노인복지관에 출근하다시피 한다. 국악, 댄스, 노래 교실 등등, 복지관에서 운영하는 육체적 정신적 건강에 좋은 프로그램에 참여하며 나이보다 열 살 정도는 젊게 사는 나의 언니. 결혼 전에는 은빛 억새였다가, 결혼 후에는 잿빛 억새, 노년에 이르러 금빛 억새로 가장 아름다운 시절을 보내는 나의 큰언니.

그러나 언니가 진정 아름다운 이유는 다른 데에 있다. 젊은 시절 너무나도 많은 아픔을 겪으면서도 언니는 어떻게 결혼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을까. 그 어떤 척박한 환경에서도 뿌리 내리는 억새처럼, 그 어떤 바람도 뼈대 꼿꼿이 세우는 당당함으로 모든 어려움 이겨낸 내 큰언니. 마침내 찾은 금빛 억새꽃 아름다움이 오래오래 지속하기를….

/이수안 한국농어촌여성문학회 전 편집장, 회장 역임, 문예운동 신인상, 한국포도회 이사, 향기로운포도원 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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