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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여담] 산다는 것은형효순

강냉이 두어 알 심기 딱 좋을 만큼 닳은 호미다. 그래도 땅 맛이 좋아 버리지 않고 쓰기도 하지만 이 호미는 나만 아는 비밀이 있다.

삼십대 후반쯤이었다. 아이들은 졸망졸망, 사는 것도 헐떡헐떡 무엇이건 속이 차지 않아 어디론가 떠나고 싶었던가 보다. 사나흘을 고민하다 보따리라는 것을 싸서 대문 앞에 섰다. 대문 밖이 바로 논인데 어제부터 개구리가 요란하게 물었다. 어디로 갈 거냐? 어디가 더 나을 것 같으냐? 앞산에서 소쩍새가 서글프게 물었다. 친정어머니는 어쩔래? 너 잘살기를 바라는 그 마음을 어쩔래? 집 뒤 상수리나무에서 까치마저 깍깍거렸다. 그것도 못 참으면서 어떻게 살려고? 검둥이가 어슬렁거리며 나오더니 치마끈을 물고 빙빙 돈다. 외양간 소는 너 알아서하라는 듯 눈만 껌벅거린다.

식구들만 천하태평 단잠에 빠져 있다. 결국 호미하나 들고 날이 새려면 멀었는데 겁도 없이 산 밑 팽고개 밭으로 향했다. 겨우 간곳이 밭이라니. 새벽달 희미한 밭고랑에 고추나무들이 줄지어 서있는 밭은 이미 삼일 전에 매어서 풀 한 포기 없는데 고랑에 퍼질러 앉아 호미로 땅을 팠다. 한번 파서 눈물 묻고 두 번 파고 한숨 묻고 세 번 파고 욕심 묻고 파고 또 파고…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고추나무에선 별을 닮은 고추 꽃이 조잘조잘 하얗게 피어났다. 아니 괜찮다고 하얗게 웃고 있었다.

퍼뜩 집으로 가는 길이 두려워졌다. 이른 새벽 물꼬 보려고 나오는 사람들과 마주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머리는 이슬에 젖어 축축하고 옷과 얼굴은 온통 붉은 황토가 묻어 엉망이다. 마을 뒷길이 더 안전할까 앞길이 더 안전 할까 생각해보니 겨우 이렇게 하려고 며칠을 그토록 힘들게 고민 했나 못난 내 자신이 싫지만 집을 향해 달렸다. 다행이 아무도 마주치지 않고 무사히 대문으로 들어섰는데 쇠죽을 끊이시던 아버님이 “어젯밤 대문도 잠그지 않고 잤나 했는데 네가 열었구나.” 내 몰골을 몰라보실 만큼 아직 날이 새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아님 알고도 모르는체하셨을까.

가끔은 아픈 마음을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 훨씬 고마울 때가 있다. 애꿎은 주인 때문에 맨땅을 수도 없이 파야 했던 호미를 헛간에 걸었다. “산다는 것은 가끔 그래요. 나만 알고  있을게요. 속상하면 언제나 같이할게요.”

그랬다. 그날 이후 호미는 아무에게도 이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때로는 지독하게 아팠던 지난날들이 그리움으로 찾아온다.
 

   
 

형효순
전북문인협회 회원, (사)한국농어촌여성문학회장 역임
행촌수필문학상 수상
수필집 ‘재주넘기 삼십년’, ‘이래서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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