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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여담] 천생 농사꾼이수안

햇사레복숭아 작목반 회의가 있는 날이다. 서둘러 나왔는데도 회의실은 벌써 빈자리가 별로 없다. 복숭아 수확이 막바지에 들었으니 모처럼 시간을 낸 사람이 많은 게다. 그런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사람들의 처진 어깨에서 올해 복숭아 농사가 흉년에 가격까지 낮았음을 느낄 수 있다.

올해는 농사짓기에 참으로 애로사항이 많은 해였다. 봄부터 여름 초입까지는 복숭아나무가 타들어 갈 정도의 가뭄에 농사꾼의 목도 타들어 가는 듯했다. 그 질긴 생명력의 풀조차도 배배 뒤틀리며 말라버리고는 하던 가뭄이었다. 야속하기 짝이 없는 가뭄에 맞서 밤잠을 설쳐가며 물을 대던 날이 숱했다. 기특하게도 복숭아는 그 와중에도 하루하루 실한 열매로 자라주었다. 나는 토실토실 살이 오르는 복숭아를 보며 혹독한 가뭄을 이겨낸 나무가 대견해 고단했던 계절을 잊어버릴 만큼 감동하고는 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이번에는 비가 문제였다. 복숭아 수확 철이 되자마자 시작한 비가 날이면 날마다 주야장천 퍼부어댔다. 그렇게도 대지를 달구어대던 해는 행방불명되었는지 흔적도 없고 비만 줄기차게 내렸다. 몇 해 전에 배수 불량을 해결하기 위해 밭이랑마다 물이 잘 빠지는 유공관을 묻는 대공사를 했건만 그마저도 올해는 역부족이었다. 밤낮으로 물에 젖어 있는 땅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복숭아나무. 그 가뭄에도 쉬지 않고 복숭아에 차곡차곡 축적한 당분을 물은 가차 없이 훔쳐 달아나버리고 말았다.

작년에 비하면 당도가 훨씬 떨어지는 복숭아 맛에 실망을 금할 수 없었다. 내가 키운 복숭아 맛이 겨우 이 정도라니. 사방에서 택배로 복숭아를 보내달라는 연락이 왔지만 나는 사정을 설명하고 보내지 않았다. 그러나 나무에 주렁주렁 열린 복숭아를 버릴 수는 없지 않은가. 어쩔 수 없이 도매시장으로 나간 내 복숭아. 어느 알뜰한 주부는 풍부한 향과 과즙, 단맛을 기대하며 내 복숭아를 사 갔을 것이다. 온 식구가 내 복숭아를 통해 화목한 시간을 가져야 마땅하거늘, 내 복숭아가 한 가정의 귀한 시간을 방해했을 거라는 데에 생각이 미치면 한숨이 나온다. 농사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농사는 농사꾼 힘만으로 짓는 것이 아니라 하늘이 도와주어야 한다는 긴 변명이라도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회의가 끝나고 늦은 식사까지 마치고 밤거리로 나왔다. 북상하는 태풍이 몰고 오는 바람 탓인지 찬 기운이 목선을 파고든다. 감기 기운이 있는 나는 얼른 집에 가고 싶은데 일행들은 길거리에서 빙 둘러선다. 평년보다 훨씬 낮은 소득에 가라앉았던 처음의 분위기와는 달리 내년을 이야기하는 열띤 표정의 얼굴 얼굴들. 그러면 그렇지. 힘들다고 자식 키우는 것을 포기하는 부모가 어디 있던가. 무슨 품종이 좋고, 나무의 수형은 어떤 것이 좋은지 등등을 이야기하는 사람들, 아무리 힘에 벅차도 뚜벅뚜벅 이 길을 가는 천생 농사꾼들이다.
 

   
 

이수안
한국농어촌여성문학회 편집장, 회장 역임
한국포도회 이사
향기로운포도원 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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