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봉희

[한국농어민신문] 

두 살, 세 살 외손주가 하루 자고 나더니 빨랫감이 수북했다. 빨리 빨아서 말려야 옷을 갈아입힐 것 같아 세탁기에 확 부었다. 순간 탕 하는 소리가 들렸다. 겨울이라 빨랫감이 얼어 그런가 보다 하고 세탁기 동작 버튼을 눌렀다.

집 앞에 꽃 농사짓는 하우스가 있어서 두 손주를 데리고 꽃구경을 갔다. 세 살짜리 손주가 꽃을 만지면서 어찌나 좋아하는지, 사진을 찍으려고 보니 핸드폰을 들고 오지 않았다. 얼른 집으로 와서 핸드폰을 찾는데 아무리 찾아봐도 나오지 않았다. 스마트워치로 눌러보아도 벨 소리는 감감무소식이다. 그런데 세탁기에서 빨래가 다 되었다고 삑삑 소리가 났다. 빨래를 꺼내는데 세상에나, 핸드폰이 깨끗하게 빨아져서 세탁기에서 나왔다.

이 핸드폰은 새로 산 지 3개월밖에 안 되었다. 아들이 이번에는 비싼 핸드폰이라 잃어버리면 안 된다면서 스마트워치까지 손목에 채워주었는데 어떡하나, 아들한테 야단맞을 생각을 하니 어미 체면이 영 말이 아니다.

언제부터인가 금방 만진 물건도 어디 두었는지 생각나지 않고, 상대방과 통화하면서도 핸드폰을 찾는다. 아들의 권유로 치매 검사를 했다. 100점 만점에 95점, 매우 건강한 정신 상태라는 결과가 나왔다. 기분이 날아갈 것 같아 아들에게 큰소리를 쳤다.

“폰은 애기들 때문에 정신이 없어서 그렇게 된 거야. 내 친구들도 다 한두 번씩은 잃어버렸대. 너도 내 나이 돼 봐라.”

손주들이 연년생이다 보니 예쁘기는 한데 정신없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손주가 오면 반갑고 갈 때는 더 반갑다고 했나 보다. 요즈음 우리 세대에서 유행하는 말이 있다. 65세부터 10년이 인생 황금기라는 것이다. 깜빡깜빡할 때는 속이 상하다가도 그럴듯한 이 말을 생각하면 위로가 된다.

젊을 때처럼 기반 잡느라 동동거리지 않아도 되고, 학생들처럼 어려운 영어나 수학 문제를 풀지 않아도 되며, 취직하려고 이 기술, 저 기술 배우지 않아도 되고, 아이들 다 키워 출가까지 시켰으니 더는 돈 걱정 안 해도 되고…. 젊은이들처럼 반짝반짝 빛나는 센스는 없지만, 내게는 젊은이들에게 없는 경험과 내공이 있지 않은가.

‘그래, 나는 이제부터 꽃길만 걸어갈 수 있을 거야. 나 자신을 사랑하고 칭찬하며 씩씩하게 사는 거야.’

글을 쓰다가 잠시 눈을 감았다 떠보니 천장에서 인생 기차가 지나가고 있는 것 같다. 잠시 쉬어가는 역들도 있고, 경로도 바뀌고, 가끔 사고도 나는 인생길. 기차표는 우리 부모님이 끊어주셨는데, 같이 여행하다가 어느 순간 부모님은 우리 형제들만 남겨놓고 홀연히 내려버린 기차여행이다. 

나도 언젠가는 내 아이들을 남기고 이 기차에서 내리겠지. 앞으로는 지금보다 더 정신도 흐려지겠지만, 여행하는 동안은 최선을 다해 즐겁게 살 것이다. 나의 여행이 끝나고 종착역에서 내렸을 때 내 자식들이 너무 많이 슬퍼하지 않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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