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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여담] 시월의 햇살이수안

[한국농어민신문]

자욱한 안개로 아침을 연다. 그저께 내린 비에 촉촉해진 대지 덕분일까. 유난히 짙은 안개가 마치 구름이 이동하는 것처럼 움직인다. 굳이 눈을 감지 않아도 시심이 피어오를 신비스러운 풍경이다.

어린이집 노란 버스를 기다리는 두 손녀는 양팔을 벌리고 환호성을 지르며 안개 속을 뛰어다닌다. 강아지 ‘나무’가 저도 끼고 싶은지 줄을 풀어 달라 낑낑대며 야단이다. 손녀들을 태운 어린이집 버스가 떠나자 ‘나무’도 제집으로 들어가고 주위는 다시 침잠에 든다. 복숭아 수확 철이 지나 바쁠 것 없는 마을도 몽환의 세계에 더 머물 모양이다.

깊은 잠에 빠진 듯 고요하던 마을을 깨운 것은 시월 햇살이다. 겹겹이 낀 안개를 걷어내자 드러나는 마을은 여전히 한가롭다. 소매 걷어붙이고 내달리던 여름날의 그 활기찬 풍경이 아니다. 어쩌면 숙제를 마친 여유인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어디 보통 숙제던가. 재배면적 증가로 해가 갈수록 과잉생산 되는 복숭아 농사로 한해 생계를 마련해야 하는 간단치 않은 일이었다. 근년 들어 해마다 창궐하는 천공병은 농사꾼의 골머리를 앓게 했다. 가뭄, 태풍 등등의 난폭한 날씨 앞에서 때로 인간의 나약함을 절감하기도 했다.

올해 유난히 농사꾼을 괴롭힌 것은 해충 피해였다. 순나방이라는 아주 고약한 해충이 있는데, 암컷 한 마리가 한꺼번에 200여 개의 알을 낳는다. 한해에 다섯 세대까지 내려가니 초장에 잡지 못하면 기하급수적으로 번식한다. 봄에는 어린 순의 목 부분 속살을 먹어치우던 유충이 수확기가 가까워지면 복숭아 꼭지 쪽을 파먹어 낙과시켜버리는 아주 못된 벌레다. 구월에 수확하는 늦복숭아가 심한 피해를 보았다.

친환경 농사를 짓는 나는 열심히 방제해도 피해 복숭아가 늘어 효과가 직방으로 안 나타나는 약 탓인 줄 알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일반 살충제도 거의 방제가 안 되어 다른 과수원들도 엄청난 피해를 보고 있었다. 방제를 하다하다 나중에는 진이 다 빠져 툭툭 복숭아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전에 없던 이 일을 진단하느라 한동안 의견이 분분했다. 지난겨울의 따스했던 날씨, 농약에 대한 내성이 생겨 더 강력해진 해충, 잔류 농약 허용치를 강화한 PLS 제도를 도입하면서 농약 회사에서 살충효과가 떨어지는 농약을 생산한다는 의견까지…. 이점을 극복해야 하는 또 하나의 난제를 안은 동네. 만족하지 못하는 결과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이 집집이 머물러서일까. 시월 햇살에 둘러싸인 마을 전경이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느냐는 듯 마냥 평화롭다. 

주위의 산과 들은 지난 계절 농사꾼이 해낸 일과는 다른 그 어떤 일의 들머리에서 수런거린다. 시끄러운 세상이 눈치 채지 못하도록 가만가만, 가장 큰 이야기를 가장 조용히 풀어놓을 모양이다. 짙은, 더욱더 짙은 초록을 만들어 쟁여가던 여름날의 잎새들. 얼마 전부터 그 초록이 퇴색하나 싶더니 시월 햇살이 쓰다듬자 하나둘 꽃잎으로의 새 삶을 시작한 것이다. 길지 않은 이야기가 각양각색으로 활활 타오르다 불꽃이 잦아들면 곧 겨울이 들이닥치겠지. 시월이 짧다 해도 이 축제에 담긴 의미를 안다면 아쉬운 계절도 긴 여운으로 남지 않을까.

촌부로 살아온 수십 년, 세월의 갈피마다 켜켜이 쌓인 이야기에는 들추고 싶지 않은 아픔이 숱하다. 싱싱한 초록으로 찬란한 계절을 보내기는커녕 찢기고 데이며 그 여름을 다 보냈다.

이제 초록 계절의 막바지에 섰다고 느낄 때쯤 두 손녀가 내게로 왔다. 빛바랜 잎새를 어루만져 꽃 피우게 하는 시월 햇살의 모습으로 손녀 둘이 내 삶에 뛰어든 것이다. 지난 시간, 더 짙은 초록을 쟁이지 못했어도 괜찮다. 그 여름을 관통한 단어가 통증이었어도 이제는 상관없다. 그 때문에 시월 햇살이 이리 찬란하다는 것을 더 잘 알게 되었으니까. 

복숭아 농사 때문에 몹시 분주한 계절을 보낸 뒤에 맞은 시월이다. 이 눈부신 계절에 나는 요란하지 않은 기쁨을 손녀들과 만들고 싶다. 일곱 살 서연이가 좋아하는 소꿉놀이도 많이 하고, 세 살 하윤이가 좋아하는  곤충채집도 자주하면서 자잘한 행복을 누리고 싶다. 가장 큰 이야기를 가만가만 풀어내는 저 산과 들처럼. 

/이수안 한국농어촌여성문학회 전 편집장, 회장 역임, 문예운동 신인상, 한국포도회 이사, 향기로운포도원 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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