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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여담] 달빛 산책이수안

어지간히도 맹렬한 더위다. 기다리는 비 소식은 없고 대지는 점점 더 뜨거워진다. 그러나 복숭아 수확 철을 맞은 농사꾼으로서 휴가를 떠난다는 건 언감생심이다. 다행히 여기 그 누구도 부럽지 않은 나만의 피서 법이 있다.

밭일은 어둑어둑한 새벽에 시작한다. 매일 서너 시간씩만 하면 풀 관리나 도장지 정리, 수확 등의 일을 웬만큼 치울 수 있다. 일하다가 어느 순간 머리카락을 타고 땀이 흘러내리면 슬슬 대지가 달궈진다는 신호다. 그러면 지체 없이 일손을 멈춘다.

그리고는 과수원 입구 교육장으로 들어 가버린다. 복숭아 몇 알, 핸드폰, 라디오, 몇 권의 책, 그리고 커피를 준비하고 본격적으로 피서를 즐기는 것이다. 에어컨을 틀어놓고 책을 보다가, 라디오를 듣다가,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다가….

늘 아파트로 출퇴근하다 교육장 넓은 공간에서 하룻밤 지내보니 마치 근사한 펜션에서 묵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한동안 있을 요량으로 아예 짐을 옮겨와 버렸다. 그랬더니 딸, 사위, 손녀도 뒤따라왔다. 전기요금이 겁 나 에어컨도 마음 놓고 못 켜는 아파트보다 과수원이 여름 나기에 적격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온 가족이 본격적으로 묵은 지 어언 보름이 되었나 보다. 작업장 귀퉁이에 오종종한 싱크대에서 식사 준비를 하는 것도, 다소 불편하게 샤워를 하는 것도, 소피를 보기 위해 바깥 화장실을 가는 것도 특별한 재미다.

며칠 전이었다. 밤중에 밖으로 나갔다가 나는 넋을 잃을 뻔했다. 교육장의 계단을 내려서는데 놀라운 풍경이 눈에 들어온 것이다. 다른 별에서 온 아주 섬세하고 가벼운 실로 짠 달빛이라는 부드러운 천이 야외교육장 넓은 마당에 활짝 펼쳐진 게 아닌가. 달빛은 더위에 축 늘어졌던 나무와 풀들을 어루만져 생기를 불러오고, 풀벌레 소리도 감싸 안아 애잔한 음향으로 편곡해 달빛 안에 스며들게 했다. 불과 몇 시간 전에 존재했던 엄청난 폭염은 흔적도 없고, 음성읍을 포근하게 둘러싼 저만치의 산들이 달빛 아래 고즈넉했다. 산 속에는 숲의 정령이 옹기종기 모여 그들만의 목소리로 달빛 노래를 부를 것만 같았다. 그러자 내 안에서 이삼십 년 깊은 잠에 빠졌던 낭만이라는 감성이 부스스 깨어나고 있었다.

마침내 나는 내가 가진 언어와 감성으로는 표현해 낼 수 없는 신비스러운 그 풍경 속으로 빨려들었다. 미세하게 피어오르는 안개와 몸을 섞은 달빛을 따라 몽환의 세계로 든 것이다. 달빛과 하나 된 나는 혼자이되 함께이며, 침묵하되 그 시간만의 특별한 언어로 주변과 교감하고 있었다. 깊은 밤, 홀로 달빛 산책하는 주인의 뒤를 강아지 <나무>가 쫄랑쫄랑 따르고 있었다.

햇빛과 더불어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오는 달빛, 그러나 우리 사는 모습이 하도 복잡하여 공짜로 오는 이 달빛마저도 누릴 여유가 많지 않다. 그래서 나는 엉뚱한 상상을 해 보았다. 오늘도, 어제도, 열흘 전이나 한 달 전에도…. 에어컨도 못 켜고 이 폭력적인 더위를 고스란히 겪어 내야 하는 우리의 이웃. 내 몸을 휘감은 이 달빛을 넉넉히 잘라 그 이웃들에게 전해 줄 수는 없을까 하고….
 

   
 

이수안
한국농어촌여성문학회 편집장, 회장 역임
한국포도회 이사
향기로운포도원 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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