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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여담] 건망증에 걸린 사람들이수안

[한국농어민신문]

정월 대보름이다. 예전에는 보름밥을 먹고 나서야 한해 농사를 시작했다는데, 지금 우리 동네는 과수원마다 막바지 전지작업에 한창이다. 더러 잔가지 정리까지 마치고 대보름의 한유를 즐기는 이웃도 보인다. 아직 전지를 반도 못 한 나는 몸도 마음도 분주하다. 몇 가지 나물 반찬을 만들어놓고 밭으로 든다.

“쓰윽 스으윽.”

전동가위의 차가운 기계음을 들으며 잘려나가는 가지, 가지들. 이 일이 한해 농사의 성패를 결정짓는 시작이라고 생각하면 한 번의 가위질도 허투루 할 수 없다. 더군다나 복숭아 농사 경력이 짧은 나로서는 바른 판단을 위해 더 많이 생각하고 집중해야 한다. 잘라야 할 가지와 남겨야 할 가지를 선택하면 신속히 가위질을 한다. 어릿어릿하다 일이 밀리면 풍년 농사에도 지장이 있고 일도 많아진다.

일이 늦어진 것은 게을러서만은 아니다. 나무 입장에서 보면 겨울잠을 푹 잘 자야 겨울을 무사히 나는 데 도움이 될 터, 깊은 잠에 빠졌는데 가위질을 자꾸 해대면 얼마나 성가시겠는가. 올겨울은 다행히 따스했지만, 기록적인 한파가 덮친 지난겨울에는 온 동네에 동해 입은 나무가 속출했다.

나는 여섯 품종 중에 두 가지 품종이 동해를 입었다. 추위에 약한 품종은 깨어나지 못할 정도로 동해가 심해 지난가을에 새 품종을 심었다. 한 품종은 나무는 살았으나 꽃 동해가 심해 수확을 못 했다.

우리 밭 바로 옆 과수원은 피해가 더 컸다. 바깥주인의 상심이 너무 크자 그 아내가 살뜰히 모아온 통장을 내놓았다. 이 통장이면 일 년은 버틸 것이니 너무 기죽지 말라고 당부했다. 아내의 바람대로 바깥주인의 낯빛에 그늘이 걷혔다. 그러나 이내 그 잘 웃던 얼굴에 웃음기가 사라지고 발걸음에 힘이 빠져버렸다. 아내는 그제야 알았다. 바깥주인을 기운 빠지게 한 정체는 돈만이 아니었다는 것을.

당신 바깥주인은 농사일을 정말 좋아한다고 했다. 농사가 직업이니 그냥 하는 것이 아니라 복숭아나무 가꾸는 것을 즐긴다는 것이다. 본인이 원하는 대로 나무의 수형을 만들며 전지를 하고, 마음 쓰이는 나무는 잎새와 수세를 보아가며 따로 관리하고, 그에 따라 변화하는 나무와 대화하며 다람쥐 풀 방구리 드나들 듯 수시로 밭을 드나드는 사람. 그렇게 교감해오던 나무들이 봄이 되어도 싹을 틔우지 않으니 그 심정이 오죽하겠는가.

어제 본 나무를 오늘 또 들여다보고, 이제 포기해야지 하면서도 내일 또 들여다볼 것을 아는 아내는 이제 더 위로할 말을 찾지 못한다. 죽은 나무 자리에 새 나무를 심어 가꾸어야 바깥주인의 발걸음에 다시 성큼성큼 힘이 생길 것을 알기에 시간이 흐르기를 기다리며 지켜볼 뿐이다.

그렇게 돌다리도 두드리는 심정으로 겨울잠을 잘 재우려고 늦게 시작한 전지 작업이다. 겨울 가뭄이 심했는데도 따스한 날씨 덕분인지 잘린 가지의 단면이 촉촉하다. 겨울눈을 잘라본다. 겉껍질 속에 고이 싸인 초록빛 생명에 안도한다.

지금쯤은 땅속 세상도 잠에서 깨어나는 생명으로 분주할 터이다. 대지는 지난 단비를 놓치지 않고 머금었다. 뿌리가 그 촉촉한 물기를 올려보내면 겨울을 무사히 난 겨울눈은 올록볼록 한껏 부풀어 오를 것이다. 마침내 겨울을 박차고 와르르 쏟아지듯 복사꽃이 피어나면 나는 건망증에 걸린 사람처럼 지난해의 아픔은 잊은 채 또다시 풍년의 꿈을 꾸겠지.

간간이 내려다보는 발밑에도 언뜻언뜻 수상한 낌새가 보인다. 겨우내 누르죽죽하던 냉이나 망초가 조금씩 몸피를 키우며 기지개를 켜는 중이다. 머지않아 흙덩이를 이고 어린 쑥이 올라오면, 달래도 뾰조롬히 얼굴 내밀 것이다. 절대 물러나지 않을 것처럼 꽁꽁 얼어붙은 추위를 봄이 밀어내고 있다.

봄이 이렇게 엄청난 일을 하는데 어찌 지난해의 아픔을 잊지 못하겠는가. 농부를 단체로 심한 건망증에 걸리게 하는 봄. 이 봄 우리 동네는 풍년 농사의 꿈에 부풀어 가위질하는 사람들로 탄력이 넘친다.

/이수안 한국농어촌여성문학회 전 편집장, 회장 역임, 문예운동 신인상, 한국포도회 이사, 향기로운포도원 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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