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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여담] 들판에서

봄빛에 끌리어 논을 돌아봤다. 겨울 나고 처음 딛는 발걸음이다.

농사의 시작은 논두렁 태우기련가?

큰 길 유천둑에는 달맞이 대와 쑥대가 멋대로 휘어져 마른장승처럼 버티고 서있다. 그들을 낫으로 치고 갈퀴로 끌어 드문드문 모아놓고 불을 지른다. 화다닥! 번지는 불길이 이른 봄의 장관을 펼쳐낸다. 또한 갈퀴발이 지나는 곳엔 어린 쑥이 쑤욱 올라오는 것도 감격스럽다. 꽁꽁 언 땅에서 죽은 듯 버텨왔던 저 생명…….

아버지도 이 시기에는 어김없이 논두렁을 태우셨다.

논두렁을 이어, 이어 다 태우고 나면 바소쿠리에 삽 한 자루 얹고 논으로 들어가셨지.

지난 가을 볏짚을 거두며 높아진 논바닥에 댓가지를 꽂아두었던, 그곳의 흙을 삽으로 파 지게에 얹고 얕은 쪽 논바닥에다 붓던 숱한 작업, 그 일을 작답(作畓)이라고 하셨다.

논두렁을 태우며 바라보는 논에는 아직도 물이 고인 곳이 보인다.

콤바인 바퀴자국으로 패인 골에 겨우내 물이 담겼었으니 그 주변은 얼마나 춥고 고통스러웠을까?

아버지는 날짜를 정해가며 이 논, 저 논 계획성 있게 작답을 하시기에 혼자 하는 일이라도 논 갈기 쯤은 거뜬하게 해내지 않으셨던가?

아버지만큼의 뼛심작업은 못하더라도 올해는 나도 트랙터를 이용해 작답을 해야겠다고 작정해본다.
바람이 휘 몰아가는 불길에 소방차라도 출동하나 싶어 내심 걱정했는데 둑을 다 태우고 나니 몸이 떨려온다. 아직은 추운 날씬가 보다.

하지만 예정하지 않은 일을 거뜬히 해치웠으니 보너스를 탄 기분인데 집으로 그냥 돌아가기에는 무언가 아쉬웠다.

논 끝에 그늘 막으로 심은 매실나무가 제법 굵다. 화물차를 후진하여 매실나무와 화물차 간에 고무줄을 매어봤다.

- 삼천리강산에 새봄이 왔다네. 농부는 밭을 갈고 씨를 뿌린다 ~
- 강남 갔던 제비가 돌아오면 이 땅에도 또 다시 봄이 온다네 ~

아련한 소리가, 고무줄 놀이할 때 다 같이 부르던 맑은 합창소리가 바람결에 쟁쟁히 들려온다.

그러나 어림도 없다. 몸이 제대로 움직여지지가 않는다.

오른쪽 다리로 고무줄을 걸어 왼다리로 꼬았다가 팔짝 뛰어 푸는데 그만 넘어지고 말았다.

넘어진 채로 흠칫 뒤돌아본다. 먼데서 누군가 내 하는 양을 본다면 논두렁에서 푸닥거리라도 하는 줄 알 것 같다.

웃음이 쏟아진다.

50년 전으로 돌아가는 무작정 푼수짓도 옆에 남편이 없어서 가능하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달아간다.
 

   
 

이길숙
이원농장, 이원농장펜션 운영
(사)한국농어촌여성문학회 제4, 5대 회장 역임
수필집 ‘이원농장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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