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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여담] 산책길에 돌아본 추억박희남

[한국농어민신문 안형준 기자]

지인들과 점심을 먹고 가까운 곳으로 나들이를 하러 가기로 했다. 농사철에는 누릴 수 없는 여유로 바쁠 것 없이 유유자적 걸어보는 게 얼마 만인가? 찬바람이 얼굴에 닿아 볼이 시렸지만 오랜만에 걸으니 참 좋다. 가까운 곳에 이렇게 풍광이 아름다운 곳이 있음을 축복이라 생각하며 걸었다.

손주 자랑에 신이 난 사람도 있고 서른을 훌쩍 넘긴 자식이 결혼을 안 해서 속상하다는 사람, 얼마 전에 시어머니를 요양원으로 모셨는데 우리의 미래를 보는 것 같아 서글펐다는 지인, 연말에 남편이 정년퇴직을 했는데 온종일 같이 있을 생각을 하니 벌써 머리가 아프다는 친구의 푸념도 들려왔다. 오십대 중후반을 지나는 여자들의 일상이 그 대화들 속에 다 들어 있는 듯하다. 농사짓는 사람은 나밖에 없고 아직 손주도 없는 터라 나는 할 이야기가 별로 없다. 빨리 걸으면 숨이 가빠서 점점 일행과도 멀어지고 있었다.

며칠 전 겨울답지 않게 3일 동안 많은 비가 내린 탓에 계곡물이 불어나서 물소리가 음악 소리처럼 경쾌하다. 강한 물소리에 가끔 불어오는 바람 소리가 어우러져 숲속에서 들려주는 자연의 합주를 들으며 걷는다. 얼마 전 예술문화회관에서 방송국 교향악단이 들려주던 웅장하고 기품 있는 연주와는 또 다른 느낌이다.

계곡을 따라 걷는데 길옆 큰 바위에 고드름이 주렁주렁 달려 있다. 참으로 오랜만에 보는 광경이다. 바위에 매달려 있는 고드름은 누구 키가 더 큰지 자랑하듯 아래로 늘어져 있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한참 동안 고드름을 바라보았다. 유리알 같은 고드름 안에 나의 유년이 들어 있는 듯하다.

내 어렸을 때의 겨울은 왜 그리도 추웠던 걸까? 돌이켜보면 기억 속의 겨울은 항상 눈이 쌓여 있었고 지붕 밑 처마 끝에는 고드름이 달려 있었다. 우리는 누가 더 큰 고드름을 따는지 내기를 했고 손에 쩍쩍 얼어붙는 고드름을 들고 칼싸움 놀이도 했었다. 그러다가 목이 말라서 고드름을 한 입 떼어 오드득 오드득 깨물면 달짝지근하면서 속이 환해지던 그 느낌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먹을거리가 풍성한 이 시대에 살면서도 그 맛을 대신 할 수 있는걸 아직 찾지 못했다. 음식 맛의 반은 추억으로 먹는 거라는데 아마도 고드름은 추억의 맛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고드름 하나로도 충분히 즐거운 겨울 한 날을 보내곤 했다.

30여 가구 되는 산골 마을에는 집집마다 아이들의 재잘거림으로 웃음꽃이 피었고 골목마다 눈싸움이며 오재미 차기로 시끌벅적했다. 가끔은 뒷산에 올라 땔감으로 삭정이를 주워오기도 했고, 논에 얼음이 얼면 손을 호호 불어가며 얼음을 지치고 놀았다. 앉은뱅이 스케이트로 시합도 하고 얼음판에서의 고무줄놀이는 스릴이 있었다.

햇살이 곱게 퍼진 날에는 앞산 양지바른 곳에 자리 잡고 있는 묘소 앞 잔디에서 하늘 보고 누워 서로의 꿈을 이야기하기도 했다. 미순이는 간호사가 되고 싶다 했고, 순자는 선생님이 되고 싶다고 했다. 나는 시인이 되어서 아름다운 시를 쓸 거라 했고, 은순이는 엄마가 되고 싶다고 해서 우리들은 서로 바라보며 박장대소했다. 그중에서 정말로 순자는 선생이 되었고, 미순이는 가족이 이사하는 바람에 연락이 끊겼다. 엄마가 될 거라던 은순이는 두 아이의 엄마가 되어 버섯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으니 나름대로 꿈을 이룬 셈이다. 그런데 시인이 되겠다던 나는 시 한 줄 못 쓰고 살고 있으니 서글프다. 친구들도 그때를 기억하고 있을까?

변변치 않은 옷과 낡은 신발, 추위에 오돌오돌 떨며 힘겹게 겨울을 살아냈지만, 그럼에도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추억들은 추위를 녹일 만큼 풍성한 것들이기에 자꾸 꺼내어 열어보고 싶은 그 날들이다.

바위에서는 고드름이 녹아서 눈물처럼 뚝뚝 떨어진다. 내 마음속에서도 못 이룬 꿈에 대한 미련 때문인지 아니면 그 시절이 그리워서인지 고드름 눈물처럼 소리 없이 뜨거운 것이 흘러내리고 있다.

모처럼의 겨울 산책길에서 고드름을 보았고 그로 인하여 잊고 살았던 추억을 소환해서 친구들 이름도 불러보고 소싯적 꿈꾸었던 시인의 감성에 잠시나마 젖어보기도 했다. 여러 갈래 마음들이 한 곳으로 모아지지 않는데, 저만치 앞에서 지인의 목소리가 들린다. 왜 아직도 거기 있냐고 소리치는 지인을 향해 씨익 웃어 주었다.

그리고는 속으로 나에게 대답했다.

‘여기가 내 자리야.’

/박희남 한여농충북연합회 정책부회장, 음성문인협회 회원, 농어촌여성문학회 회원, 꿈꾸는 인삼농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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