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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여담] 배추와 통닭이길숙

가으내 가뭄과 고온 상태가 이어지더니 김장배추 상태가 영 아니다. 하긴, 김장 심는 날에도 날씨가 속을 썩였다. 팔월 말로 잡은 정식 날에도 30도를 넘어서서 어리디어린 묘를 불볕 속에 심어놓고 똑바로 쳐다볼 수도 없었다. 그러나 배추는 장하게 자라줬다. 자로 재어놓은 듯 똑고른 골에 미끈하게 키재기를 하는 배추들이 너무 예뻤다.

하지만 출하시기가 되어 다시 와 본 배추밭은 질서가 흩트려져 있었다. 군데군데 자리가 빈 곳에는 배추가 쓰러지고 있는 것이었다. 쓰러진 배추를 뽑아 살펴보니 뿌리가 모두 이상하였다. 중심 뿌리가 없는데다 곁뿌리는 둥글게 말려 한쪽으로 쏠려있으니 덩치가 커진 배추통이 제 무게를 지탱하지 못하고 쓰러지는 모양이었다.

쓰러지는 배추를 보는 대로 뽑아냈지만 다음 날은 더 넓게 그 다음 날은 더욱 넓게 확대될 뿐이었다. 지치는 마음에 배추농사는 실패라 결론지었다. 그러나 나만의 실패 선언은 결코 가벼울 일이 아니었다. 해마다 우리집을 믿고 와보지도 않고 주문해 먹던 단골고객들께 예약을 취소하는 일이 만만치 않은 일이란 것을 미처 몰랐다. 하필이면 김장을 준비하는데 이러느냐고 배추 값이 오르니 배짱이냐고 하는 통에 서로의 마음만 다치고 말았다.

며칠을 심하게 앓았다. 앓고 난 뒤 집의 김장을 하려고 배추밭으로 들어섰다. 나를 보고 지나가던 차가 서더니 “배추 세포기만 살 수 없어요?”라고 물어본다. 어째서 세포기냐 물으니 사실인즉 어제 김장을 하였는데 양념속이 남아 그 것을 채우려 한다는 것이다. 남편은 그냥 드리라 했으나 긴 한줄을 고르고 골라 네포기를 따서 ‘만원’만 달라 하니 고맙다고 하며 받아갔다. 이렇게 해서 배추 판매로 일만원은 건졌다. 사십 여년 농사경력에서 배추 한포기에 이천오백원이란 고가를 받은 것도 처음이려니와 천평 배추밭 판매 총금액이 일만원인 것도 처음 있는 일이다.

고춧가루를 빻아오다 큰길 회전거리에서 전기 통닭구이를 보았다. 네모난 기계 안에서 벗은 닭들이 빙글빙글 돌아가는 것을 보며 ‘춥지는 않겠구나’ 하는 엉뚱한 생각을 하였다.

아까 배추밭에서의 만원이 손에 잡혔다. 두 마리에 만원이라고 하였다. 그러니까 올해 배추 농사지어 번 돈 전부를 통닭과 바꾸었다. 평소에 닭고기를 좋아하지도 않는데 통닭 맛이 궁금하였던 것일까? 아니다 다만 통닭 기계를 돌리는 저 사람도 한가정의 가장이려니... 가정을 충실히 지키느라 아슴아슴한 이 계절에 기계를 돌리러 나왔을 것이라는 알량한 자비심이 앞서 있었던 것 같다.

작은 닭 두 마리를 식지 않게 호일 봉투에 담아주는 손길이 따뜻하였다. 남편은 아직도 밭에 있을 터이다. 곧장 밭으로 가 봉투를 펼치니 웬 닭이냐고 눈으로 묻는다. ‘배추표 통닭’이라고 이름붙이니 껄껄 웃으며 “마음 고생 여러 날 하였으니 단백질도 필요할 거여!”라고 한다.

버린다고 작심은 하였지만 눈으로 보면 버릴 수 없을 것 같은 배추밭에 앉아 닭다리를 뜯는 맛도 괜찮은 것이 그만큼 농사에 달관한 나이 탓일까? 또 이렇게 계절을 보낸다. 설마 내년에도 올해 같은 날씨는 아니겠지? 내년에는 올해 실패한 몫까지 포함하여 배추 농사를 정말 잘 지어볼 생각이다.
 

   
 

이길숙
이원농장, 이원농장펜션 운영
(사)한국농어촌여성문학회 제4, 5대 회장 역임
수필집 ‘이원농장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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