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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농 최양부의 자전적 농정사 <10>우루과이라운드(UR) 농업무역협상의 최전선에 서다-(7)1992년 대선 후보들은 하나같이 대선 공약으로 쌀 시장개방 절대 반대를 약속했다

[한국농어민신문]

우농 최양부

1992년 11월 20일 마침내 미국과 EU가 양자 협상을 통해 쟁점 사항을 타결 지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UR 협상 타결은 이제 시간문제였다. 주제네바대표부는 “UR 협상 타결이 임박했다. 이제는 쌀시장개방을 수용하는 방향으로 정부방침을 바꿔야 한다”라며 정부의 입장변경을 건의하는 전문(電文)을 정부에 보내왔다. 이상옥 주제네바대표부 대사 후임인 박수길 대사는 부임 직후부터 정부의 UR 농업협상팀이 협상의 판 전체를 보지 않고 오로지 우리 쌀만 보며 실현 가능성 없는 시장개방 예외주장을 하고 있다고 했다. 박 대사의 ‘협상 타결임박설과 쌀시장개방 예외주장철회 건의’로 농림수산부에는 갑자기 비상이 걸렸다.

이 무렵 국내에서는 대통령선거운동이 한창이어서 우리의 쌀시장개방문제가 대선 후보들 간에 중요한 선거 쟁점이 되었다. 김대중 후보는 “쌀을 비롯하여 쇠고기, 우유, 고추 등 15개 품목 모두 시장개방 하지 않겠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자 김영삼 후보는 “대통령직을 걸고 쌀 시장개방만은 막겠다”라고 약속했다. 1992년 11월 대선 후보들은 하나같이 농민 표를 의식하고 대선 공약으로 쌀시장개방 절대 반대를 약속했다.

농림수산부는 11월 24일 긴급대책회의를 개최하고 박수길 대사의 건의 전문을 검토했다. 과연 박 대사의 건의처럼 UR 협상 타결이 임박했는지, 연내 타결 가능성이 있는지 등에 대한 정확한 상황판단이 절실했다. 나는 제네바 현지 동향파악 임무를 띠고 제네바로 급파되었다. 12월 5일 서울을 출발 23일까지 제네바에 머무르며 1991년 UR 협상을 통해 맺은 개인적인 인맥 등을 총동원하여 연내 협상 타결 가능성 등에 관해 수집한 정보와 평가의견 등을 정리한 ‘UR 협상 동향과 전망보고’ 자료를 대표부를 거치지 않고 팩스로 직접 농림수산부로 보냈다.

UR 협상은 박 대사의 건의와는 달리 미-EU 간 합의에도 EU는 회원국인 프랑스 등의 반대로 회원국 간 합의가 완전히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미국은 새로 대통령에 당선된 빌 클린튼 정부의 출범을 앞두고 있어 사실상 UR 협상을 타결 지을 수 있는 여건이 못되었다. UR 협상 연내 타결은 무산되고 1993년 1월 15일 UR 협상으로 넘어갔다. 나는 농림수산부에 보낸 동향보고를 통해 연내 타결 가능성은 없다는 점과 정부 일각의 ‘쌀시장 조기개방론’에 동요하지 말 것을 건의했다. 농림수산부는 박 대사가 보내온 협상 조기타결 임박설을 일축했다.

하지만 박 대사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또다시 ‘쌀시장 조기개방론’에 불을 지폈다. 박 대사는 UR 협상에 대해 정부와 입장을 조율한다는 명분으로 일시 귀국하여 12월 30일 기자회견을 열고 미국의 신속처리권한 시한을 이유로 “2월 말까지 협상이 타결될 것”이라며 “이제는 한국 정부가 쌀시장개방에 대해 정치적 결단을 내려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박 대사의 발언으로 정치권 일부에서는 김영삼 대통령당선자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노태우 정부가 쌀시장개방을 추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도 나왔다. 나는 박 대사의 주장은 협상 진행 상황을 오판한 것일 뿐 아니라 협상 전략 측면에서도 잘못된 것이라고 정치권에 설명했다. 그의 주장은 ‘모든 것이 합의되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합의된 것이 없다’는 ‘협상의 황금률’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며, 쌀 시장개방 여부는 개방조건 등과 연계하여 마지막 협상에서 협상의 지렛대로도 사용할 수 있으므로 최후 순간까지 우리 입장을 고수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더욱이 “쌀시장개방 만은 직을 걸고 막겠다”는 김영삼 당선자의 공약을 지키는 의미에서도 일방적인 조기개방은 안 된다며 정부 교체기에 등장한 조기개방 움직임을 막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특히 서상목 민주자유당 정책위원장 등을 만나 설득했다. 대통령직 인수위원회가 쌀시장 조기개방론을 반대하면서 사태는 수습되었고 박수길 대사는 허승 대사로 교체되었다.

1993년 2월 25일 김영삼 정부가 출범하면서 농림수산부 장관에 한국농촌경제연구원 허신행 원장이 취임하고. 연구원장에는 정영일 서울대 교수가 부임했다. 나는 농림수산부 장관 UR 농업협상 자문관직을 사임하고 연구원(부원장)으로 복귀했다. UR 협상은 미국 정부의 신속처리권한 연장요청에 대한 미국의회 심의가 늦어지면서 사실상 진전이 없었다. GATT도 던켈 사무총장의 임기가 1993년 6월 말로 예정되어 있어 후임자 선임을 두고 설왕설래하고 있었다. UR 협상은 움직이지 못하고 태풍 전야의 정적에 휩싸여 있었다. 나는 긴장감에서 벗어나 모처럼 찾아온 휴식을 만끽하며 밀린 과제들을 수행했다.

1990년 10월부터 1993년 2월 말까지 2년 5개월간 나는 그야말로 UR 농업협상에 붙잡혀 있었다. 그러면서 틈틈이 국제회의에도 참석했다. 1991년에는 일본에서 열린 제21차 세계농업경제학회에, 1992년에는 네덜란드에서 열린 ‘환경과 무역에 관한 국제세미나’에 참석했다. 특히 제21차 세계학회에서는 아시아 출신 학자들과 별도 모임을 같고 1985년 제19차 세계학회(스페인 말라가)에서 결성한 ‘아시아농업경제학회 창립준비위원회(위원장 최양부)’의 결정에 따라 ‘아시아농업경제학회(ASAE, Asian Society of Agricultural Economists)’ 창립을 공식으로 선언하고 1993년 8월 서울에서 창립기념 제1차 아시아학회 학술대회를 열어 학회 임원진 등을 선출하기로 했다. 그때까지 학회 임시의장을 내가 맡아 학술대회를 준비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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