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농(愚農) 최양부

미국의 농업경제학자들은 1960년대 중반 이후부터 ‘진정한 농업경제학자는 이제 멸종되었다’며 농가를 기업으로 ‘의제’하고 기업경제이론을 농가경제이론으로 간주하는 ‘의제주의 방법’을 따르고 있었다. 나는 ‘기업이 아닌 농민을 기업으로 보자’는 의제주의 방법론은 사실에 기초하여 진리를 추구하는 실사구시의 학문적 자세에 정면으로 위배된다고 생각했다.



1974년 7월 초, 그랜드 캐니언을 만나러 간다는 들뜬 마음으로 그레이하운드 버스에 몸을 실었다. 그랜드 캐니언이 죽기 전에 꼭 한번 가보아야 할 나의 버킷리스트에 오르게 된 것은 고등학생 시절 교과서에서 천관우 님의 그랜드 캐니언 기행 수필 ‘ K 형에게’를 읽고부터였다. 미주리 콜롬비아에서 출발한 버스 안에서 먹고 자며 꼬박 하루 반을 달려 텍사스주를 횡단하여 애리조나 피닉스로 가서 다시 그랜드 캐니언으로 들어갔다. 그랜드 캐니언은 석양빛을 받아 붉게 불타오르며 어둠 속으로 모습을 감추어 가고 있었다. 천관우의 말대로 그랜드 캐니언의 ‘소름 끼치도록 웅혼 괴괴한 절승’이 내 심장을 뛰게 했다. 그곳에서 하룻밤을 지낸 다음 날 동트기 전에 일어나 어둠 속의 그랜드 캐니언이 새벽 햇살을 받으며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며 시시각각으로 펼치는 빛과 색과 그림자의 향연을 감상했다. 그것은 마치 불 꺼진 극장에 앉아 장엄한 서곡에 이어 무대 커튼이 열리면서 조명을 받아 휘황찬란한 무대 모습이 드러나고 출연자 모두가 환희의 합창을 부르며 등장하는 웅대한 오페라를 보는 것 같았다. 그랜드 캐니언이  전부 모습을 드러낼 때까지 서너 시간 동안 넋을 잃고 그저 그렇게 바라만 보았다. 

그러다 불현듯 거대한 자연 앞에 앉아있는 초라한 모습의 나를 보았다. 이역만리 미국까지 와서 지난 2년간 전전긍긍하며 좋은 학점 따기 위해 아등바등 살아온 날들이 떠올랐다. 학점은 잘 받았지만 그렇게 배운 경제이론들이 과연 우리 농(農)에 무슨 소용이 될 수 있을지 의문이 일었다. 경제학과에서 배운 전공 필수 경제이론들의 유용성이 뭔지 의문이 생겼다. 미국의 농업경제학자들은 1960년대 중반 이후부터 공공연하게 ‘진정한 농업경제학자는 이제 멸종되었다. 농업경제학이란 학문은 없다. 오로지 농업문제에 응용하는 (일반) 경제학이 있을 뿐이다. 경제이론은 자연법칙과 같이 진리다. 농업경제학자들이 할 일은 경제이론을 농업과 농민 문제에 응용하는 일이다’라며 농업경제학을 응용경제학으로 재정립했다. 응용경제학자들은 농가를 기업으로 ‘의제(擬制)’하고 기업경제이론을 농가경제이론으로 간주하는 ‘의제주의 방법’을 따르고 있었다. 응용경제학적 모델연구 모두가 농가(민)를 기업(인)으로, 농업경제를 시장경제로 의제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사우스워스 교수가 ‘수리 모델에는 한국농민이 살아 숨 쉬지 않는다’며 미시간대학으로 가는 것을 극구 만류했던 그 이유를 그제야 깨달았다.

나는 ‘기업이 아닌 농민을 기업으로 보자’는 의제주의 방법론은 사실에 기초하여 진리를 추구하는 실사구시의 학문적 자세에 정면으로 위배 된다고 생각했다. ‘소농들의 경제행위를 사실적으로 연구하라’시며 ‘한국농업경제학은 독자성을 갖는 학문이다’라고 역설하신 김준보 교수의 사실주의 방법론과 비교하여 어느 입장이 타당한지에 대한 해답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대로 공부를 끝내면 앞으로 연구 활동을 하는 평생 농업경제학에 대한 자부심도 긍지도 갖지 못하고 일반경제학의 아류가 되어 이론 없는 농업경제를 한다는 ‘학문적 열등감’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 같았다. 농업경제학에 뜻을 세우고 학문의 길을 걷겠다고 나선 나 자신의 존재의미를 찾기 위해서라도 농업경제학의 학문적 정체성 문제만큼은 반드시 따져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랜드 캐니언을 떠나 콜롬비아로 돌아오는 내내 나는 그랜드 캐니언의 감동은 다 잊은 채 미국의 농업경제학은 언제 어떻게 생겨났고, 언제 어떻게 응용경제학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으며, 경제이론은 과연 진리인지, 본래 지식이란 무엇이고 학문은 무엇인지, 흥분된 마음으로 앞으로 풀어야 할 연구방법론적 과제들을 떠올렸다.
버스가 미주리 콜롬비아에 도착할 무렵 나는 농업경제학이 어떤 성격의 학문인지 반드시 알아야만 하고 이를 박사학위 논문 연구주제로 하겠다는 마음을 정하고 있었다.

여행에서 돌아온 나는 곧바로 브레이스 지도교수를 만나 내 생각을 말씀드렸다. 농업경제학의 학문적 정체성을 찾기 위해 사회과학철학에 대한 공부를 새로 시작하겠다는 것과 이를 주제로 박사학위 논문을 쓰겠다고 했다. 브레이스 교수는 담담하게 ‘자네 생각을 존중한다. 자네는 뜻을 세우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지도교수가 학생을 지도하지만 학생으로부터 배울 경우도 있다. 이번에는 자네를 통해 배우고 싶다’라고 하셨다. 그는 한 가지 조건을 내세웠다. ‘자네 생각을 존중하나 솔직히 자네가 철학을 주제로 박사학위 논문을 쓸 수 있을지 판단할 수 없으니 철학과 담당 교수로부터 자네가 할 수 있다는 확인편지를 받아오면 그때 결정하자’라고 하셨다. 당시 지도교수가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계획한 논문이나 잘 쓰라’고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만일 내가 지도하는 학생이라면 나는 말렸을 것 같다. 그러나 그는 어디로 가는지, 얼마가 걸릴지 알 수도 없는 ‘해도 없는 항해(uncharted sailing)’를 시작하겠다는 나를 말리지 않았다. 나는 그때 그 결정을 내려준 브레이스 교수를 평생 잊을 수가 없다. 

나는 철학과로 (사회)과학철학을 강의하시는 존 쿨천(John H. Kultgen) 교수를 찾아뵙고 자초지종을 말씀드리고 1974년 9월 새 학기부터 그의 강의를 듣기 시작했다. 두 번째 학기가 끝나는 1975년 5월 학기 말 시험 대신 과제물로 제출한 ‘인간행동의 사회적 성격에 관한 성찰’이란 철학에세이를 높이 평가한 쿨천 교수는 ‘내가 철학 논문을 충분히 쓸 수 있으며 자신이 내 논문 지도교수가 되어주겠다’라는 내용의 편지를 지도교수 앞으로 보내주셨다. 나는 마침내 농업경제학이란 학문의 본질을 찾아 미지(未知)의 바다를 향해 닻을 올렸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한국농어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