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농(愚農) 최양부

농협은 통합논의 과정에서부터 심각한 진통을 겪었다. 통합처리 위원이었던 김준보 교수는 “이건 협동조합이 아니야, 위원들 일부는 협동조합이 무언지 잘 모르고 있어, 무책임한 발언을 마구한단 말이야. 녹음기를 갖다놓고 하나하나 녹음을 하라”면서 정체성이 불분명한 새 농협의 강제 설립에 강하게 반발했다.


박정희 군사정권 (군정)은 전격적으로 1961년 6월 15일 농업협동조합(구 농협)과 농업은행(농은) 통합을 결정하고, 6월 16일 농림부에 농협·농은 통합처리요강(요강)을 시달하면서 7월 말까지 새로운 통합기구를 설립하라고 지시했다. 또한 군정은 요강에서 통합처리위원회를 구성하여 특별법 제정을 논의하되, 신용사업부문은 정책금융기관으로서의 역할을 담당케 하고, 설립기금은 출자금과 보조금 등으로 조성하도록 하는 등의 지침을 주었다. 이는 5월 25일부터 군정의 지시에 따라 농업은행이 수행하고 있는 농어촌 고리채 정리 사업을 새로운 통합기구가 차질 없이 추진하게 하려는 조치로 보인다.

농림부는 군정의 요강에 따라 6월 19일 농협·농은 통합처리위원회(위원장 장경순 농림부장관)를 12명으로 구성하고, 8차례의 회의 끝에 7월 1일 농협 및 농은 통합요강을 확정하였다. 또한 7월 3일에는 새 통합 농업협동조합(새 농협) 설립을 위한 법안을 작성하여 국가재건최고회의에 제출했다. 최고회의는 7월 29일 새 농협법을 공포하고 8월 4일 초대 중앙회장에 현역군인인 육군대령 임지순을 임명하고 8월 15일 새 농협을 출범시켰다. 

새 농협은 중앙회와 8개 도지부, 140개 시·군 조합과 383개 지소, 101개의 특수조합, 그리고 2만1042개의 이동조합으로 조직되었다. 1957년 농협·농은 분리이전의 금융조합시절의 시군 금융조합과 식산계가 각각 시·군 조합과 이동조합이 되었고, 산업조합에 속했던 특수조합을 모두 흡수했다. 새 농협중앙회는 농은이 3억 원(99.9%), 구 농협중앙회가 110만 원을 출자한 출자금 총 3억 110만원으로 정책금융 업무를 수행하는 특수 법인으로 설립되었다. 이와 동시에 별도의 특수 법인으로 설립된 140개 시·군 조합의 출자금은 총 2억 20만 원이었다. 새 농협의 직원은 총 4476명으로 이중 3656명(82.7%)이 농은, 820명(18.3%)이 시·군 조합과  농협중앙회 출신으로 이들 가운데 887명이 중앙회에, 3597명이 시·군 조합에  재배치되었다.

새 농협은 형식과 명분은 농협이 농은을 흡수 통합하는 모양새이나 출자금과 직원 수에 있어서 농은이 압도적 다수를 차지함으로써 농은은 이름을 버리고 새 농협을 장악했다. 한편 농협중앙회는 조합원의 인적결합체인 이동조합과 시·군 조합, 특수조합 등이 설립한;연합체가 아닌 독립적인 특수법인체로 설립되고 이들 조합들은 회원조합으로 가입하게 했다. 새 중앙회는 농업은행이 수행했던 정책금융을 담당하는 금융기관으로 기능함과 동시에 정부의 위임을 받아 시·군 조합과 이동조합, 특수조합을 지도, 감독하는 일종의 상위 권력기관이 되었다. 

이러한 농협은 통합논의 과정에서부터 심각한 진통을 겪었다. 통합처리 위원이었던 김준보 교수(서울대 농대)는 “이건 협동조합이 아니야, 위원들 일부는 협동조합이 무언지 잘 모르고 있어, 무책임한 발언을 마구한단 말이야. 녹음기를 갖다놓고 하나하나 녹음을 하라”면서 정체성이 불분명한 새 농협의 강제 설립에 강하게 반발했다고 한다. 일부 위원들은 장관이 별 달고 있다고 세상일 마음대로 다 된다고 생각하냐면서 회의 진행방식에 강한 불만을 표시했고, 회의 결과에 대해 역사의 심판을 받아야 한다는 발언도 서슴지 않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통합추진위원들은 새로 설립되는 새 농협의 정체성을 두고 격론을 벌였다. 그들은 조합원 중심의 협동조합인지, 정부 주도의 농촌개발기구인지를 분명히 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위원회는 협동조합을 만들되 ‘협동조합으로서 자율성을 지양하고 잠정적으로 정부의 적극적인 참여와 자체 상위기관의 능동적인 지도’를 받는, 다시 말하면 정부가 관리하는 협동조합으로 만들어 농업정책금융 등 정부사업을 대행하는 농촌개발기구로서 기능하게 한다는 결정을 내리면서 새 농협의 정체성에 혼란을 일으키는 원인을 제공했다. 군정은 1962년 1월에는 ‘농업협동조합 임원임명에 관한 임시조치법’을 제정하여 농협의 인사권을 장악하고, 대통령이 중앙회장을, 중앙회장이 시·군 조합장과 이동 및 특수 조합장을 임명하면서 1989년 농협중앙회장 및 조합장 직선제가 실시 될 때까지 28년간 정부의 지시와 감독을 받는 관제농협으로 만들었다.

농협중앙회는 새 농협의 출범을 신용사업과 경제사업을 종합한 종합농협의 탄생으로 평가하며 기념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신용부문과 경제부문의 회계를 내부적으로 엄격히 구분하고 경제부문은 매년 신용부문으로부터 자금을 차입하여 사업을 하고 회계연도 말에는 원금과 이자를 상환하는 비정상적인 방식으로 사업을 하게 함으로써 농협이 농민 조합원이 생산한 농산물을 제 때 제 값을 받고 잘 팔아주기 보다는 농민을 상대로 돈 장사에만 치중한다는 비판을 받게 되었다.

새 농협은 구 농협의 임직원들에게는 안정된 일자리와 봉급을 보장해 주었지만 협동조합의 가치와 원칙을 저버린 영혼 없는 농협이 되었다. 임직원들은 농민 조합원의 경제적 이익과 사회적 지위향상을 위해 조합원에게 봉사하는 사업을 하기 보다는 정부가 위촉하는 사업을 대행하여 수수료를 비롯한 재정지원과 조세감면 등 각종 특혜지원을 받고 신용사업에 편중하면서 경영수익을 높이는 방식으로 안이하게 농협을 운영함으로써 협동조합으로서 존재 이유마저도 망각한, 조합원 위에 군림하는 관료적 사업조직이 되었다. 그러기에 농민 조합원들과 협동조합운동가들은 농협을 협동조합 본연의 가치와 원칙에 따라 조합원의 이익을 위해 일하고 조합원이 자주적으로 참여하고 민주적으로 결정하는 바른 농협으로 제자리를 찾아 세우기 위한 농협 민주화를 향한 대 장정을 시작하였으며 그 투쟁은 오늘 날까지도 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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