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농어민신문]

우농(愚農) 최양부 

유엔 식량농업기구( FAO/UN)는 1982년 한국을 2차대전 후 산림녹화에 성공한 유[한국농어민신문] 일한 개발도상국으로 평가했다. 산림청은 1979년부터 시작한 ‘제2차 치산녹화계획(1979∼1986)’도 성공적으로 마무리했다.


정부는 1986년 3월 5일 농어촌종합대책을 통해 1973년 3월 농수산부에서 내무부로 이관되었던 산림청을 다시 농수산부로 환원한다고 발표했다. 이를 근거로 산림청은 14년만인 1987년 1월 1일 농수산부로 다시 이관되었다.

1972년 10월 유신으로 독재체제를 강화한 박정희 대통령은 1973년 1월 12일 연두 기자회견에서 “전 국토를 녹화하기 위한 10개년 계획을 세워 푸른 강산으로 만들겠다”며 치산녹화의 결의를 밝혔다. 박 대통령은 1월 15일 손수익 경기지사를 산림청장으로 임명하고 “산림청을 내무부로 옮길 테니 최선을 다해 산림녹화를 이룩하라”면서 내무부가 새마을운동처럼 치산녹화운동을 추진하라고 지시했다. 1973년 2월 23일 비상국무회의에서 정부조직법을 개정하고 3월 3일 산림청을 내무부로 이관시켰다. 박 대통령의 1973년 산림청의 내무부 이관 결정은 황폐된 산하를 복구하는 국가적 치산녹화운동의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손 청장은 ‘법과대학 임학과’ 출신이란 말을 들으며 집무실에 ‘산, 산. 산! 나무, 나무, 나무!’라는 구호를 붙여놓고 5년 8개월 동안 ‘제1차 치산녹화 10개년계획(1973~1982)’을 진두지휘했다.

박 대통령은 이승만 초대정부가 1949년 대통령령으로 지정한 후 ‘사방(砂防)의 날’로 대체하며 폐지시킨 ‘식목일’을 1961년 12월 ‘산림법’을 제정하여 부활시키고 헐벗은 민둥산을 푸른 숲으로 바꾸기 위한 ‘치산치수(治山治水)’에 나섰다. 식목일을 공휴일로 지정하고 군인, 학생, 공무원 등 전 국민을 식목운동에 참여하도록 했으며, 1963년 2월에는 아예 ‘국토녹화촉진 임시조치법’을 제정하고 국민의 식목운동참여를 의무화하며 조림사업을 거국적으로 추진했다.(현재는 노무현 정부가 2006년 식목일을 국가 공휴일에서 폐지시킨 이후 정부기념일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으나 지구온난화, 미세번지 등으로 부활해야 한다는 여론이 높다) 박 대통령은 식목과 사방을 독려하고 연료림 조성, 아궁이 개량, 산림조합 설립을 촉진하는 한편 임산물단속법, 사방사업법, 화전(火田)정리법 등을 제정하고 도벌(盜伐)근절책을 강력하게 추진했다.

박 대통령은 1964년 12월 서독방문 당시 비행기에서 독일 산야를 뒤덮고 있는 ‘검은 숲, 흑림(黑林)’을 본 후 “우리 산이 푸르게 변할 때까지는 유럽에 가지 않겠다”라며 치산녹화에 대한 각오를 다졌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후 정부는 1965년 ‘치산녹화 7개년계획(1965~71)’을 세웠고, 1967년 1월에는 농림부의 산림국을 ‘산림청’으로 승격시켜 외청으로 독립시키고 조림과 사방사업을 추진하는 한편, ‘국립공원제’를 도입하여 지리산을 제1호 국립공원으로 지정한 후 설악산, 한라산, 속리산 등 13개소(2018년 현재 22개소)를 국립공원으로 지정하고, 1971년에는 ‘그린벨트(개발제한구역)’을 지정하여 산림보호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러나 헐벗은 국토 모습은 쉽게 달라지지 않았다. 박 대통령은 특단의 조치로 산림청을 내무부로 이관시켜 내무부가 지방행정과 경찰조직을 총동원하여 치산녹화운동을 추진하도록 하고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 도(시,군)에 산림국(과)을 신설했다. 1973년 산림청은 제1차 치산녹화 10개년 계획을 수립하고 내무부는 조림운동과 ‘입산통제’에 나섰다. 당시 김현욱 내무부 장관은 자신을 ‘산림장관’이라 칭하며 녹화운동에 앞장섰다. 척박한 땅에서도 빨리 잘 자라는 리기다소나무, 포플러, 아카시아, 현사사나무 등과 잣나무, 낙엽송 등을 심었고, 1977년에는 ‘육림의 날’을 지정하고 학생, 군인, 공무원, 직장인 등을 참여시켜 나무에 비료를 주거나, 가지치기, 간벌(間伐), 해충구제 등의 육림사업을 추진했다. 단기간 내에 30억 5400만 그루의 양묘를 생산 108만ha에 나무를 심었고, 420만ha의 육림, 4만2000ha의 사방사업을 마무리했다. 그 결과 산림청은 치산녹화 10개년 계획 목표를 6년만인 1978년에 달성했으며 헐벗은 민둥산은 푸른 숲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특히 박 대통령의 최대 관심지였던 경북 영일지구 황폐지 4538ha는 5년(1973∼1977년)간 ‘조림 전투’를 벌려 산 밑에서 기름진 흙을 지게로 산 위로 져 날라 나무를 싶어 푸른 숲으로 바꾸는 기적을 만들어냈다. 이런 노력 덕분에 1976년에는 연료림 조성을 목적으로 세계은행으로부터 420만 달러의 차관을 도입한 것이 세계적 뉴스가 되었고. 미국 CNN TV 방송은 한국의 산림녹화운동을 세계에 알렸다. 유엔 식량농업기구( FAO/UN)는 1982년 한국을 2차대전 후 산림녹화에 성공한 유일한 개발도상국으로 평가했다. 산림청은 1979년부터 시작한 ‘제2차 치산녹화계획(1979∼1986)’도 성공적으로 마무리했다.

1970~80년대 우리는 또 한 번 세계가 놀란 ‘산림녹화의 기적’을 일으켰다. 이는 “민족사적 대 역사(役事)이고 세계 임정사 상 일대 사건이었다.’(김연표, ‘산림청의 내무부 이관과 환원,’ 농정반세기의 증언, 한국농정 50년사 별책부록, 한국농촌경제연구원편찬, 1999:430) 박정희 대통령의 집념과 리더십, 산림 행정 공무원의 추진력, 식목운동에 동참한 국민과 수많은 독림가(篤林家), 그리고 리기테다소나무와 현사시나무를 육종한 세계적 육종학자 현신규(玄信圭, 1911~1986) 교수와 임학자들의 헌신이 합력하여 만들어낸 역사적 쾌거였다. 1987년 산림청의 농수산부 환원은 ‘녹화임정시대’를 성공적으로 마무리 짓고 푸른 숲을 국민 휴양과 레저 등 산지의 다목적 이용과 자원화를 위한 새로운 ‘경영임정시대’의 개막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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