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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농 최양부의 자전적 농정사 <7>전환시대의 경제 논리와 개방농정을 비판하다 -①우리 농(農)의 역사적 현실 앞에 서다
   

우농(愚農) 최양부

김동희 농업경영연구소장은 미국 농무부 경제연구소를 벤치마킹하여 연구소를 정책적으로나 학술적으로 권위 있는 세계적 연구소로 만든다는 일념으로 동분서주하셨다. 그는 학연, 지연을 가리지 않고 우수인재 영입과 양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공자는 70세에 이르러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15세에 학문에 뜻을 두었고(志學), 30세에 자신이 살아갈 길을 찾아 세웠다(而立). 40세에는 세상의 유혹에 흔들리지 않게 되었고(不惑), 50세에 자신의 천명을 알았다(知天命), 60세가 되어서야 세상의 소리를 알아듣게 되었으며(耳順), 70세에 비로소 마음 가는 대로 해도 도리에 어긋나지 않게 되었다(從心)”라고 술회했다. 나는 19세(1964)에 농을 가슴에 품었고, 23세(1968)에 농경제학이란 학문연구를 통해 우리 농민을 위하고 농업발전에 도움을 주는 학자의 삶을 살겠다는 뜻을 세웠고, 32세(1977)에 박사학위를 취득하면서 그 뜻을 실천하며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미국에서는 박사학위를 독립 연구를 할 수 있는 면허증이라고 한다. 나는 면허증을 받아들고 더 나은 농의 내일을 위한 연구로 우리 농정의 새 역사를 써보겠다는 넘치는 자신감과 포부와 각오로 뜨겁게 벅차올랐다.

1977월 7월 초, 5년간의 유학 생활을 정리하며 귀국준비로 나쁜 날을 보내고 있던 나는 김성호 국립농업경제연구소장으로부터 뜻밖의 편지를 받았다. 김 소장은 7월 말 미국 위스콘신대학교 토지연구소가 주최하는 농지개혁 세미나에서 논문발표를 위해 미국 출장을 가니 자신의 출장일정에 맞추어 미국여행을 같이하고 함께 귀국하자는 내용이었다.

5년 전인 1972년 6월, 서울을 떠난 뒤 농업경영연구소에는 변화가 많았다. 1973년 11월 ‘국립농업경제연구소’로 확대 개편되어 국가정책연구기관으로서 위상이 높아졌다. 김동희 연구소장은 미국 농무부 경제연구소(Economic Research Service, ERS)를 벤치마킹하여 연구소를 정책적으로나 학술적으로 권위 있는 세계적 연구소로 만든다는 일념으로 동분서주하셨다. 그는 학연, 지연을 가리지 않고 우수인재영입과 양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1974년부터는 전문연구인력 보충을 위해 ‘계약 공무원제’를 활용하여 박사학위를 받고 대학에서 강의 중인 농업경제학자들을 연구소 초빙연구원으로 위촉하여 연구과제 책임을 맡겼다. 경상대 이정한, 명지대 오호성, 서울대 김호탁, 중앙대 김성훈, 서강대 성배영 교수 등이 참여했다. 연구소는 서중일 유통경제, 김정배 농업경영, 김성호 농업개발연구 과장이 김동희 소장과 호흡을 맞추며 활발하게 정부 정책 수요에 대응한 연구를 수행하는 한편 연구결과를 한국농업경제학회에서 발표하도록 하여 학회와의 교류를 확대하면서 학계를 이끄는 중심 연구기관으로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했다. 서중일 과장은 후일 주미 농무관으로, 김성호 과장은 농림부 농지과장으로 발탁되면서 농수산부와의 인적교류도 넓혀나갔다.

김동희 소장은 정책개발 연구 수요가 날로 증대하는 현실에서 박사학위를 가진 우수 연구 인력 확보를 위해서는 연구소를 한국개발연구원(KDI)과 같은 재단법인으로 개편하여 연구 인력에 대한 처우를 획기적으로 개선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특히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마친 연구소 출신 연구원들의 귀국이 예상되는 1977년경까지는 개편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판단하고 행동에 나섰다. 김 소장은 1975년 농수산부 장덕진 차관과 경제기획원 등을 설득하여 연구소 개편에 대한 공감대를 만들었으나 연구소를 KDI와 통폐합하자는 안이 막바지에 제기되는 바람에 무산되었다. 농수산부 일각에서조차 연구소가 재단법인이 되면 연구소에 대한 통제력이 약화될 것을 우려하며 반대하는 목소리가 있었다. 그러는 동안 연구소는 1975년 6월부터 시작된 제4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1977~1981) 농림수산부문 계획수립에서 중심 역할을 한다. 특히 계획수립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김동희 소장이 농정에 대한 새 비전이 필요하다는 최각규 농수산부 장관과 박정희 대통령 새마을 특별보좌관이며 김 소장의 대학 동기이기도 한 박진환 박사의 지원을 받아 1976년 농림부 기획관리실장으로 승진 발탁되어 5개년계획 수립을 마무리 지으면서 연구소는 국가적 농정연구기관으로 확고하게 자리 잡았다.

김동희 소장 후임으로 1976년 4대 연구소장에 취임한 김성호 소장을 5년 만에 위스콘신대학교에서 다시 만나 세미나가 끝나자 같이 미국여행을 시작했다. 김 소장은 대학 시절 동아리 모임인 농사단(NSD)에서 만난 대선배로 연구소 생활도 같이했다. 미국유학으로 5년간 대화가 단절되었다가 다시 만나 단둘이서 10여 일간 미국여행을 하는 것은 긴장도 되고 한편 어색하기도 했다. 그러나 차츰 그동안의 회포를 풀고 밀린 대화를 계속하다 보니 어느 사이 큰 형님처럼 가까워졌다. 김 소장은 특히 나의 박사학위 논문에 많은 관심을 보이며 질문을 계속했다. 그리고는 ‘연애만 하는 줄 알았는데 진짜 공부를 했구먼’이라고 했다. 김 소장은 미네소타대학을 방문하여 연구소 직원으로 박사과정 공부를 하던 허신행 선배를 격려하고, 워싱턴 D.C.에 들러 김정룡 주미 농무관 안내로 미국 농무부 ERS를 방문했다. 우리는 마지막으로 미주리대학에 들러 한인학생회가 준비한 환영 겸 환송 파티에 참석한 후 귀국 길에 올랐다. 김 소장은 비행기가 태평양 상공을 날고 있을 때 대뜸 ‘미국에서 배운 것은 모조리 태평양에 던져버리고 귀국하라’시며 ‘지난 5년간 새마을운동 등으로 우리 농업과 농촌에 많은 변화가 일어났으니 농촌현장부터 찾아보고 농업에 대한 공부를 새로 시작하라’고 하셨다. 떨리는 마음으로 5년 만에 고국의 땅을 다시 밟고 어머니와 재회하고 선친(先親)의 산소를 찾아 참배했다. 이어 동대문구 홍릉에 자리 잡은 국립농업경제연구소에 귀국신고를 하고 농업연구사(4급 갑 국가직 연구공무원)에 복직했다. 나는 우리 농의 역사적 현실 앞에 다시 서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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