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농(愚農) 최양부

박정희 정부는 선성장 후분배 전략에 따라 경제성장에 의한 국민소득의 공평한 분배는 더 높은 성장을 위한 자본축적을 위해 경제가 성숙할 때까지 유보한다며 노동자와 농민에게는 저임금과 저곡가정책으로 희생을 강요했다.


박정희 정부는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1962~1966)을 성공적으로 마무리 지으면서 1965년부터 제2차 5개년계획(1967~1971) 수립에 착수하여 1966년 7월 29일 최종안을 확정 발표했다. 1차 계획 동안 한국경제는 연평균 7.8%의 높은 성장을 기록하였으며 농림수산부문은 5.6%, 제조업 부문은 15.0%씩 성장했다. 특히 정부는 1963년부터 호조를 보이기 시작한 노동집약적 상품 수출을 통한 경제성장 가능성을 확인하고 1964년부터 ‘수출만이 살길이다’며 경제개발전략을 수출주도형으로 전환하기 시작했다.

정부는 2차 계획의 2대 기본목표를 한국경제의 산업구조 근대화와 자립경제건설 촉진으로 정했다. 이를 위해 식량자급과 산림녹화, 수산개발과 특히 영농을 다각화하여 농가소득향상에 노력하는 한편, 화학, 철강, 기계공업을 육성하여 공업고도화의 기틀을 세우고, 수출 7억 불을 달성하여 국제수지를 획기적으로 개선하며, 고용을 증대시키면서 가족계획을 통한 인구팽창 억제 등을 구체적 정책목표로 제시했다.

정부는 2차 계획을 추진하면서 경제성장 극대화에 최고 가치를 두는 성장지상주의의 관점에서 정부가 경제성장 목표와 과제, 추진전략을 결정하고 이에 필요한 재정, 금융 등 투자재원 확보와 배분 등을 총량적으로 관리하는 정부주도형 경제개발전략을 확립했다. 정부는 특히 성장거점개발전략에 따라 서울·수도권과 대도시우선개발과 불균형 성장전략에 따른 공업우선개발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정부는 수출주도의 대외지향적 성장전략에 따라 수출에 앞장선 대기업에게 정책금융과 저금리, 조세감면 등 각종 특혜지원을 하며 집중적으로 육성했다. 박 대통령은 1965년부터 ‘월간 경제동향보고’, 1966년부터 ‘수출진흥 확대회의’를 매월 직접 주재하고 경제개발전략 전반을 지휘 감독하는 ‘박정희식의 압축적 경제개발전략’을 체계화했다. 두 회의는 1979년 9월 박 대통령이 타계할 때까지 매월 15년간 중단 없이 계속되었다.

정부는 수출촉진을 위해 1967년 4월 ‘관세와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 General Agreement on Tariffs and Trade)’에 가입하고 본격적으로 무역입국에 뛰어들었다. GATT 가입은 우리도 GATT 규약과 자유무역과 시장경제 원칙에 따라 전면적으로 시장을 개방하고 자유무역 국가가 되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가입 당시 한국은 개발도상 국가로서 GATT 규정에 따라 농산물시장 전면개방 등을 일정 기간 유예받는 한편 GATT 회원국들로부터 최혜국 대우를 받으며 선진국 시장에 자유롭게 진출하여 수출을 증대시킬 수 있었다. 우리는 GATT 체제에 무임승차하면서 GATT 체제의 최대 수혜국이 된 것이다. 그러나 22년 후인 1989년 이후부터는 유예를 받지 못하고 농산물시장을 전면적으로 개방하게 된다.

정부는 선성장 후분배 전략에 따라 경제성장에 의한 국민소득의 공평한 분배는 더 높은 성장을 위한 자본축적을 위해 경제가 성숙할 때까지 유보한다며 노동자와 농민에게는 저임금과 저곡가정책으로 희생을 강요했다. 정부는 특히 농업·농촌부문에 대해서는 경제성장을 위한 ‘농업/농촌 역할론’에 경도되어 값싼 식량과 저임 노동력의 안정적 공급, 외화획득을 위한 농림수산물 수출, 그리고 공산품의 내수시장 역할을 강조하였다. 농업/농촌 역할론은 다름 아닌 농민 희생론이었다.

이러한 국가 경제발전은 산업구조가 1 차산업에서 2, 3 차산업으로 바뀌는 것이고, 이 과정에서 농업은 국민경제에서 차지하는 상대적 비중이 점차 작아지면서 궁극적으로 사양산업, 쇠퇴산업으로 전락하고, 농민은 공업화를 위한 무제한의 잠재적 저임 노동력 공급원이 되어야 하고, 농촌은 전근대성의 상징이 되어 미래가 없는 떠나야 할 곳이라는 등 농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우리 사회에 팽배하게 되었다. 이러한 현실에서 농업, 농촌, 농민의 3농이 유기적으로 통합된 전통적 농경사회는 산업화의 충격을 받으며 기능적으로 분리되고 해체되고 있었다.
이러한 현상들은 사실 18세기 중엽 이후 서구사회가 경험한 산업혁명의 여파로 전통적인 농경사회가 산업사회로 탈바꿈하는 문명전환의 과정이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피할 수 없는 사회적 갈등으로 향도이촌(向都離村)하는 농민이 줄을 이으며 농촌사회가 동요하고 농민의 불만이 확산하고 있었다. 이에 박정희 대통령은 자신의 정치적 기반인 농민의 지지 확보를 위한 특단의 조치로 1968년부터 고미가 정책을 도입했다.

2차 5개년 계획은 1차 계획의 식량 자급을 위한 증산 농정의 기조를 유지하면서 1차 계획 동안 새롭게 나타난 도·농간 소득 격차 해소를 위해 농가소득증대와 농업근대화를 목표로 하는 농공병진 정책을 표방했다. 1965년 이후부터는 다행히 국내 식량 사정이 호전되고 곡가도 안정을 되찾기 시작하면서 미 잉여농산물 도입도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농정의 제1당면과제는 식량 증산이었고 주곡의 자급달성이었으나 자급은 여전히 요원하기만 했다.

무엇인가 새로운 전략이 필요했고 농촌진흥청은 주곡자급달성을 위한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1964년 허문회(許文會, 1927~2010) 교수를 중심으로 서울대 농대 육종연구팀과 진흥청 작물시험장의 연구진으로 특별 연구팀을 구성한 정부는 필리핀에 있는 국제쌀연구소의 협력을 받아 쌀 다수확 신품종 개발에 착수했다. 허 교수팀은 3년여의 각고의 노력 끝에 마침내 1967년 ‘IR 667’이란 다수확 신품종인 ‘기적의 볍씨’ 육종에 성공했다. 그러나 농가 보급 여부를 최종으로 확정하기까지는 4년간의 검정시험이 더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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