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농어민신문]

우농(愚農) 최양부

1983년 5월 18일 광주항쟁 3주년이 되는 날 거산(巨山) 김영삼은 자유와 민주를 되찾기 위한 단식을 선언하고 무려 23일간 단식투쟁을 결행했다. 거산의 생명을 건 단식투쟁은 1980년대 막혔던 자유민주 쟁취를 위한 시민저항운동의 물꼬를 트는 역사의 새 분기점을 만들었다.


1979년 1월 경제기획원이 제시한 ‘개방농정론’으로 촉발된 농정전환을 둘러싼 부처 간 정책 갈등 해소를 위한 대안 농정 모색을 위해 1980년 말에 추진한 ‘80년대 농정을 향한 새 구상’이란 특별작업이 시작단계에서 중단당하는 수모(受侮)를 겪은 후 나는 ‘21세기 산업사회 농정론’이란 큰 그림 그리기에 다시 도전했다. 1978년부터 시작된 농외소득과 농촌공업개발연구에 이어 1982년부터 ‘강진구상’으로 시작된 농촌정주생활권연구, 1983년 농가유형론연구, 그리고 1984년 농촌지역종합개발연구로 이어졌고. 1985년에는 ‘농어촌지역종합개발연구단’을 설립하여 산업사회 농촌발전전략을 새롭게 정립했다. 나는 ‘산업화 충격론’의 관점에서 ‘농경사회적 농의 산업사회적 농으로의 구조전환’을 직시하고 산업사회를 향한 21세기 농정패러다임과 농정과제 정리에 몰두하며 ‘산업사회 농정’을 설계하며 1986년에는 ‘농어촌종합대책’이란 새로운 농정의 틀을 만드는데 기여했다. 그리고 1987년 2월 나에게 새로운 도전의 기회가 다시 찾아왔다. ‘21세기 농정기획반’의 책임을 맡아 산업사회 농정의 새 비전과 과제, 전략 등을 정리하는 특별작업을 하게 된 것이다. 나는 농경제학도에게 주어진 시대적 과제에 대한 소명(召命)의식으로 나의 이름과 명예를 걸고 1979년부터 시작된 8년간 개방농정과 증산농정을 넘어 21세기 산업사회 농정설계를 위해 상상하고 고민했던 내 생각과 정신의 조각들을 맞추어 나갔다.

그렇게 연구실과 농촌현장을 뛰며 농정 틀을 새로 설계하는 작업에 정신을 팔고 있는 동안 세상 밖에서는 전두환 신군부에 대한 국민의 분노가 날로 뜨거워지고 있었다. 1983년 5월 18일 광주항쟁 3주년이 되는 날 거산(巨山) 김영삼은 자유와 민주를 되찾기 위한 단식을 선언하고 6월 9일까지 무려 23일간 단식투쟁을 결행했다. 거산의 생명을 건 초인적 단식투쟁은 1980년대 막혔던 자유민주 쟁취를 위한 시민저항운동의 물꼬를 트는 역사의 새 분기점을 만들었다. 거산은 독재정권에 맞서는 자유민주세력을 재결집하고 시민저항운동을 점화했다. 그의 단식투쟁은 외신을 타고 전 세계로 퍼져나갔으며 당시 미국에 머물고 있던 후광(後廣) 김대중과의 연대를 가져왔다. 두 사람은 ‘8월 15일 공동선언’을 발표하고 연대투쟁을 선언했다.

1983년 5월의 거산의 단식투쟁과 10월의 버마(현 미얀마) 아웅산 폭탄테러사건으로 인한 17명의 정부 각료급 인사가 순직한 사건은 전두환 정권을 뒤흔들었다. 전 정권은 1984년부터 그동안의 강압 일변도 정책을 유화정책으로 바꾸면서 구속된 반정부인사의 사면 복권과 학생 석방 및 학원자율화조치를 취했다. 정치권과 대학가의 민주화 투쟁은 더욱 열기를 품어내고 세력을 확장했다. 거산은 전통적인 온건 보수 우파 인사들 중심으로 민주산악회를 만들었고, 후광은 시민사회단체와 종교계, 학생운동권의 진보 좌파 인사들과 연대를 강화하고 있었다.

1984년 5월 18일 거산은 미국에 머물고 있던 후광과 같이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란 새로운 정치단체를 결성하고 전두환 정권 타도를 위한 정치투쟁의 최일선에 나섰다. 민추협은 재야 정치권과 종교계, 여성계 등 시민사회단체는 물론 운동권 학생단체들과 연대하여 반독재투쟁 연합전선을 구축했다. 1985년 이후 1987년 12월 해산하기까지 민추협은 우리나라 민주화 운동의 중심 세력이 되었다. 민추협은 1985년 1월 18일 신한민주당(‘신민당’)을 창당하고 1985년 2월 12일 12대 총선에 참여하여 돌풍을 일으키며 제1야당이 되었다. 후광은 총선을 앞둔 2월 8일 귀국했다. 총선에서 국민적 지지를 받은 신민당은 1986년 2월부터 ‘직선제 개헌 1000만 명 서명운동’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대통령직선제 개헌 투쟁에 나섰다.

정치권이 민추협을 중심으로 자유민주 쟁취를 위한 시민저항운동을 본격화하는 동안 대학가는 대한민국체제 자체를 부정하며 민족해방을 위한 혁명을 외치고 있었다. 그들은 광주항쟁에서 많은 시민이 학살된 사실을 은폐하고 있는 전두환 정권과 우리 사회의 비겁함과 위선에 분노하며 칼 맑스(Karl Marx)의 ‘자본론’과 ‘공산당 선언’ 등 공산주의 혁명론에 빠져들었다. 특히 서울대학교 학생들은 1985년 말부터 한국 주체사상파 운동권의 대부로 알려진 김영환이 쓴 ‘강철서신: 한 노동 운동가가 청년 학생들에게 보내는 편지’란 소책자를 통해 ‘김일성 주체사상’을 학습했다. 학생운동권을 장악한 자생적 주사파 학생들은 북한의 ‘남조선 혁명론’에 따라 ‘대한민국은 미국 식민지이며 괴뢰정권이기 때문에 타도해야 한다’라며 민족해방(national liberation, NL)을 외쳤다. “광주항쟁 이후 1980년대 청년기를 보낸 세대의 절대다수, 90퍼센트가 주체사상파, 또는 친북 반미 민족주의, NL성향으로...한국 민주화 운동의 주류가 되었다”고 한다. (주대환, 시민을 위한 한국현대사, 나무+나무, 2017:227) 1985년 이후 34년이 된 2019년, 그동안 김영환은 전향(轉向)했으나 5, 60대가 된 그때의 386 주사파 학생들은 우리 사회의 주류가 되어 정치, 행정, 사법, 언론, 교육, 노동, 문화 예술 등 모든 분야에서 대한민국을 뒤흔들고 있다. 그들은 1980년 전두환 신군부의 폭력과 광주시민의 피눈물이 낳은 ‘불운의 세대이며 시대적 이단아들’로 대한민국의 업보(業報)란 생각이 든다. 오늘 우리가 겪고 있는 보수·진보, 좌우간, 세대 간 갈등이 대한민국을 더 자유롭고, 더 민주적이고, 인권과 기회와 법치가 더 평등하게 보장되는 통일된 나라로 만들기 위한 산통(産痛)이기만을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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