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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농 최양부의 자전적 농정사] <2>춥고 배고팠던 한겨울의 한반도/②어린 날의 가슴시린 기억들
   
 

우농(愚農) 최양부

2017년 11월 1일 전남대학교 농업경제학과 대학원 특강을 위해 ‘수서 발 고속열차’(SRT)를 타고 광주송정역에서 내렸다. 지하철을 탔는데 ‘금남로 5가’역이 눈에 들어왔다. 반가운 마음에 나는 무작정 내렸다. 어린 시절 다녔던 수창국민학교 (그 때는 초등학교를 그렇게 불렀다) 에 갔다가 6년간 다닌 광주(서중)제일고등학교까지 걸었다. 지금은 도심지가 되어 달라진 거리와 주변 환경이 낮 설었지만 학교들은 그 옛날 그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탑’도 찾아보고 참배했다. 내가 학교 다닐 때부터 수창국민학교 교정을 지키고 있던 버드나무가 반가웠다. 고목이 되어 더 풍성해진 머릿결을 치렁치렁 날리고 있었다. 수창국민학교는 춥고 배고팠던 한 겨울의 어린 날에 대한 가슴시린 기억들을 떠올리게 했다.

1952년 6.25전쟁 중 나는 수창국민학교에 입학했다. 어머니는 내가 7살이 아니라 8살에 국민학교에 입학하게 된 사연에 대해 ‘학교에 입혀 보낼 옷이 없어서’라고 했다. 납득이 안 가는 설명이었지만 그 때는 나라가 전쟁 중이어서 먹고사는 문제가 급한 때라 그럴 수도 있겠다며 웃고 지나쳤다. 그러나 그 말의 참 뜻을 깨닫게 된 것은 한 참의 세월이 흐른 뒤였다.

사실 우리 가족사진첩에는 내 위로 3남매의 다정한 어린 시절 사진들이 여럿 남아있지만 나와 여동생 사진은 한 장도 없다. 우리 5남매는 마치 3+2로 나와 동생은 열외의 식구처럼 느껴졌다. 나의 가장 어렸을 때 사진은 어머니와 두 형과 같이 찍은 국민학교 2·3학년 때의 것으로 보이는 손바닥 절반 크기의 아주 작은 사진 한 장이 전부다.

아버지는 본관이 경주인 할아버지 최영기(崔泳基)와 남평인 할머니 문흥래(文興來)의 1남1녀의 외아들로 1910년 광주에서 태어났다. 조선제국이 멸망하고 한반도가 일제 식민지로 강점된 해다. 어머니는 본관이 김해인 외할아버지 김군즉(金君則)과 외할머니 홍대악(洪大岳)의 1남3녀의 차녀로 1915년 순천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를 대신한 오빠 김종순(金鍾淳)의 소개로 아버지를 만나 1937년 12월에 결혼했다. 어머니는 미국 남장로교단 선교사들이 설립한 광주수피아여학교를 1932년에 졸업했다. 그 때문에 어머니는 기독교인이 되었다. 성적은 전교 1·2등을 다투었고, 육상, 연식야구피처, 연극을 하는 등 활달한 성격의 어머니는 집안 형편상 대학진학을 포기하고 오빠의 권유로 청주에 가서 잠업지도원 교육을 받고 광주 근교에서 농촌운동을 하는 외삼촌을 도우며 ‘상록수(1935)’의 ‘채영신’ 같이 되는 꿈을 키웠다. 외삼촌은 농촌운동 중 광주지역의 소문난 문제적 청년 아버지를 만나게 되었고 그에게 반해 어머니를 소개했다. 두 분은 만나 연애를 하고 결혼하게 되었다.

아버지는 1926년 광주고보 4학년 (지금의 고1) 때 고보 2년 선배인 장재성(張載性) 등이 광주지역 중등학교에 처음 조직한 항일독립운동과 사회과학연구를 위한 학생 비밀모임인 ‘성진회(醒進會)’에 가입하면서 학생운동을 시작했다. 고보 6학년 (고3) 때인 1928년에는 학급반장으로 성진회의 후신인 독서회 활동을 하면서 아버지는 일제의 조선인 학생에 대한 차별교육에 반대하며 광주고보 동맹휴학을 주도하다 졸업을 앞두고 퇴학당했고 구속되었다.

이 사건은 1929년 11월 3일에 일어난 역사적인 광주학생독립운동의 도화선이 되었다. 아버지는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1930년 일본의 3대 명문고중의 하나인 미토(水戶)고등학교 문과에 입학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중도에 자퇴서를 제출하고 귀국하여 장재성 등과 같이 독립운동과 당시 조선의 젊은 지성들이 그랬던 것처럼 사회주의운동에 적극 가담했다. 그러는 중에 어머니를 만나게 되었고 결혼 후 아버지와 어머니는 함께 항일운동을 하게 되었다.

해방 직후인 1945년 8월 30일 광주에 조직된 ‘건국준비위원회’에 적극 참여하면서 아버지의 불안한 생활이 시작되었다. 우리 집은 해방정국의 좌우갈등의 정치적 소용돌이의 한가운데에 빠져들었고 그 와중에 내가 태어났다. 내가 태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집에 들른 아버지는 내 이름을 처음에는 돌림자인 바다 양(洋)에 하늘 천(天) 자를 붙여 넓은 마음과 큰 생각을 가진 사람이 되라고 ‘양천’이라고 지었다가, 차라리 하늘을 뚫는 더 큰 뜻을 가진 사람이 되라며 부(夫)로 고쳐 ‘양부’로 지었다.

내가 6살 때인 1950년에 일어난 6.25동란은 우리 가정에 큰 시련을 가져왔다. 집은 폭격을 당해 부서졌고, 아버지가 ‘국민보도연맹’으로 예비 검속되어 죽음의 문턱에서 목숨을 구했으나 쫓기는 몸이 되었고 결국 체포되어 무기징역형을 받고 가족과 헤어지게 된 것이다. 그 때가 바로 내가 국민학교에 입학해야 할 때였으나 나는 결국 입학하지 못했다. 그 후 아버지는 재심으로 감형을 받게 되었고 8년이 지나 내가 중2 때인 1959년 집으로 돌아왔다. 나의 국민학교 통신표 보호자 난에는 아버지 대신 어머니 이름이 적혀있다. ‘애비 없는 자식’이 되어야 했던 나의 국민학생 시절의 가슴시린 사연을 말해주고 있다.

아버지는 넉넉한 집안에 태어나 일생동안 돈을 벌어본 적이 없다. 궁핍해진 가족생계는 전적으로 어머니 몫이 되었다. 어머니는 그 때 자신에게 닥친 시련과 무거운 짐을 자녀교육으로 이겨냈고, 장사 등으로 고달픈 삶 중에도 자녀교육만은 정말 열심히 챙겼다. 어머니의 자녀사랑은 언제나 성적순으로 성적에 따라 우리는 수시로 천당과 지옥을 오갔다. 5남매 모두가 대학교육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어머니가 흘린 자기희생의 땀과 피의 열정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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