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농(愚農) 최양부

1972년 8월 하순 사우스워스 교수 추천장을 들고 미주리대학교 농업경제학과로 브라이마이어 교수를 찾아뵙고 추천장을 전하고 인사를 드렸다. 그는 미국농업경제학회장을 지낸 카리스마 넘치는 노학자로 농산물시장론을 강의하고 계셨다. 그는 학교에 농업철학자로 더 잘 알려져 있었다.


1970년 5월, 대학원 석사 졸업논문작성을 위한 농촌조사 준비 등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던 어느 날 허만 사우스워스 교수가 나를 찾으셨다. 그는 석사 논문이 끝나면 미국에 가서 계속 공부하지 않겠느냐며 미국 록펠러재단이 운영하는 농업개발협회(‘협회’) 장학생(The A/D/C Fellowship) 추천을 고려하고 있다면서 생각해보고 마음이 정해지면 알려달라고 하셨다. 상상조차 해본 일이 없는 너무나 뜻밖의 제안이어서 놀랍고 당황스러웠다.

사우스워스 교수는 아시아지역의 농업경제학이나 농촌사회학 분야 대학교수나 전문가들 가운데서 장학금 수여 후보자를 선발하여 협회에 추천하는 일을 하고 계셨다. 협회는 그의 의견에 따라 적격자를 선발하여 미국 등지 대학으로 보내 공부하도록 지원하는 장학사업을 했다.

1970~1980년대 우리나라 농업경제와 농촌사회학계 주요 인사들 가운데 박진환, 김동희, 반성환, 심영근, 박홍래, 장동섭, 서중일, 진흥복, 이질현, 구천서, 김영철, 권택진, 이정한, 문팔용, 김호탁, 김성훈, 최규섭, 유철호, 김일철, 송해균, 왕인근 등의 교수와 전문가들이 협회 추천으로 미국, 일본, 필리핀, 인도 등지에서 석·박사학위를 하거나 장·단기 연수를 다녀왔다.

내가 사우스워스 교수의 추천을 받는 것은 대학원 학생에게는 처음 있는 일로 영예로운 일이었지만, 한편으로는 미국유학을 과연 갈 수 있을지, 꼭 가야 하는지 의문이 있었다. 반미(反美)입장을 가지신 아버지 반응이 궁금했고 신원조회 때마다 ‘신원 특이자’로 분류되어 해외여행이 자유롭지 못한 현실도 마음에 걸렸다. 아직 우리 농의 현실에 대한 공부가 부족하여 미국유학은 시기상조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이번 미국유학을 통해 해외여행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길을 열고, 지피지기(知彼知己) 차원에서 자본주의 경제와 민주 정치의 본산에서 시장경제와 자유민주주의를 체험해보는 것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버지도 호치민이 프랑스 독립전쟁 중에 적국(敵國)인 프랑스에 유학을 다녀왔다며 넓은 세상을 보고 오라고 하셨다. 며칠 뒤 사우스워스 교수를 다시 찾아뵙고 미국에 가겠다고 말씀드렸다. 1년여의 심의 절차를 거쳐 1971년 11월 협회로부터 1972학년도 장학생으로 최종 선발되었다는 통보를 받았다.

1972년 1월 초 나는 협회로부터 농민·농업·농촌 문제에 대한 정치경제학·사회학적 공부를 하고 싶다는 나의 연구계획을 존중하여 내가 공부할 대학으로 ‘미주리대학교’를 선정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미주리대학교란 학교 이름을 그때 처음 알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 농업경영연구소는 미시간주립대학교와 공동으로 농업부문 중장기 개발전략을 세우는 계량모델연구가 한창이었고 인적교류도 활발했다. 그 때문에 미시간으로 가면 논문작성 등을 손쉽게 할 수 있다는 주위의 강한 권유도 있고 해서 미시간주립대학으로 가고 싶다는 뜻을 협회에 알렸다.

2월 22일 그 소식을 싱가포르에서 들은 사우스워스 교수가 뜻밖의 편지를 보내오셨다. 그는 “네가 (미시간대학 관련) 모델연구에 참여하여 학위논문을 쉽게 쓸 수 있는 편리성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너의 (학문적) 배경이나 감성 등을 보면 농민과 그들 문제에 깊은 관심이 있는데 사실 (한국) 농민과 그들의 문제는 (수리 계량) 시뮬레이션 모델 밖에 존재하고 있다. 너는 수십 년 앞을 보면서 네가 가장 만족할 연구가 무엇이 되어야 할지에 대해 자신에게 물어보고 신중하게 판단하기 바란다”라고 하시며 미주리대학교로 갈 것을 강력하게 권유하셨다. 사우스워스 교수의 편지는 잠시 판단이 흐려져 사려 깊지 못한 행동을 한 나를 부끄럽게 하는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 그는 미주리대학에 있는 자신의 친구 ‘해롤드 브라이마이어(Harold F. Breimyer)’교수를 찾아가라며 추천장까지 써주셨다. 나는 고위공직에 계신 먼 친척 할아버지와 김동희 소장의 신원보증서를 제출하고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1972년 8월 하순 사우스워스 교수 추천장을 들고 미주리대학교 농업경제학과로 브라이마이어 교수를 찾아뵙고 추천장을 전하고 인사를 드렸다. 그는 미국농업경제학회장을 지낸 카리스마 넘치는 노학자로 농산물시장론을 강의하고 계셨다. 그는 학교에 농업철학자로 더 잘 알려져 있었다. 그는 사우스워스 교수의 초청장을 읽어보시고 미주리에 온 것을 환영한다고 하셨다.

그는 외국인 학생에게 처음 두 학기가 가장 어려운 기간인데 이때만 잘 넘기면 쉬워지니 열심히 하라고 격려해 주셨다. 훗날 그는 내 박사학위 논문 심사위원으로 나의 강력한 지원자가 되어 주셨다. 그때 만일 사우스워스 교수의 강한 권유가 없었고, 만일 미주리로 가지 않았더라면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 내 인생은 아마도 지금과는 많이 다른 모습이 되었을 것 같다. 되돌아보면 미주리에서 오늘의 내 모습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에는 미주리에서 나의 장래가 어떻게 펼쳐질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사우스워스 교수는 나보다 내 감성을 더 잘 이해하고 나의 미래를 내다보며 나를 바르게 인도해 주셨다.

1972년 6월 중순 협회의 배려로 미주리로 가기 전 콜로라도 볼더에 있는 콜로라도대학교가 운영하는 여름 캠프에 참가했다. 미국경제학회가 콜로라도대학 부설 경제연구소와 공동으로 운영하는, 경제학 분야 석·박사 공부를 시작하는 외국인 학생들을 위한 2개월간의 캠프였다. 나는 그곳에서 농림부에서 온 조일호 사무관을 처음 만났다. 우리 만남은 정말 우연이었지만 훗날 농어촌발전종합대책(1987~1989), UR농업협상(1990~1993), 신농정(1994~1997) 등 우리 농정사에 남은 굵직한 정책을 함께 구상하고 추진하며 영혼을 불태운 운명의 만남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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