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농(愚農) 최양부

농경사회가 도시산업사회로 탈바꿈하는 거대한 문명 전환을 겪으며 산업사회가 형성되면서 시민들의 민주화 요구는 더욱 치열해졌고 도농간, 지역·계층간 소득 격차와 불균형성장이란 새로운 정치 경제적 갈등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1977년 8월, 5년 만에 다시 마주한 우리나라는 제3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1972~1976)을 성공적으로 마무리 짓고 새로 착수한 4차 계획(1977~1981)이 한창이었다. 3차 계획 5년간은 유학 기간과 겹쳐 나에게는 생소했다. 1972년 6월 서울을 떠난 지 3개월여가 지난 10월 17일 박정희 대통령은 10월 유신(維新)을 선언하고 헌정을 중단시키고 대통령 직선제를 폐지했다. 박정희는 새로 만든 유신헌법에 따라 12월 23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에 선출되고 종신 집권이 가능한 절대 권력을 가진 제왕적 대통령이 되었다. 1974년에는 긴급조치를 선포하고 유신독재를 비판하는 사람들을 영장 없이 체포 구속하며 독재정치를 더욱 강화했다. 유신독재에 맞서 민주화를 외치는 야당과 학생, 언론의 저항과 노동자들의 생존권 투쟁도 한층 격렬해졌다. 농민들도 강압적 증산 농정에 저항하며 농협 민주화를 외치기 시작했다. 유신독재는 1979년 10월 26일 대통령 시해 사건으로 박정희 정권이 최후를 맞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1972~1979년간의 나라는 유신독재로 자유민주주의가 억압된 정치적 암흑기였다. 경제는 유신독재를 정당화하는 정치적 명분으로 내세운 조국 근대화와 부국강병 정책으로 고도압축성장을 계속했다. 정부는 1973년 1월 ‘중화학공업 입국’을 선언하고 6월에는 기계, 조선, 전자, 화학, 철강, 비철금속 등 6개 중화학공업을 육성하여 1981년까지 수출 100억 달러와 1인당 국민소득 1000달러 달성을 목표로 하는 ‘중화학공업 육성계획’을 발표했다. 그 목표는 4년을 앞당겨져 1977년에 달성되었다. 우리 경제는 1973년 석유 파동으로 불어닥친 세계적 경제불황에도 불구하고 1975~1979년간의 중동 건설특수를 누린 연평균 11.2%라는 기록적인 고도성장을 계속하면서 자립경제기반을 구축했다. 중화학공업의 성공으로 중화학공업제품의 수출이 늘어나면서 만성적인 적자를 면치 못했던 국제수지도 획기적으로 개선되기 시작했다. 한국은 산업화의 성공으로 국민총생산에서 농림수산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1963년 42.2%에서 1977년 23.7%로 크게 줄고, 총인구에 대한 농가 인구 비중도 1963년 56.0%에서 1977년 33.8%로 감소하면서 산업국가로 구조가 바뀌고 수출을 견인하는 재벌 기업들이 등장하고 시장경제체제가 구축되고 있었다. 한국은 급격한 산업화의 충격으로 도시화, 공업화가 빠르게 진행하며 ‘한강의 기적’을 일으키고, 농경사회가 도시산업사회로 탈바꿈하는 거대한 문명 전환을 겪고 있었다. 산업사회가 형성되면서 시민들의 민주화 요구는 더욱 치열해졌고 도농(都農) 간, 지역·계층 간 소득 격차와 불균형성장이란 새로운 정치 경제적 갈등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정부는 1975년 6월, 4차 5개년계획 수립에 착수하면서 1962년 이후 지난 15년간의 한국경제개발의 성과와 과제에 대한 진단과 평가를 했다. 경제기획원은 우리 경제가 1977년을 전후로 1인당 국민소득 1000불에 이르면서 빈곤에서 벗어나고, 국민 의식과 소비구조 변화로 기대 욕구가 상승하고, 시장경제가 확립되고, 국제수지가 만성적 적자에서 흑자로 전환하는 등 구조 전환기에 들어선다고 진단했다. 특히 국제수지가 흑자로 전환된다는 사실을 중시하고 외환증가로 발생하는 통화팽창과 재정인플레이션을 막기 위해 외환을 국내물가안정 수단으로 활용해야 한다고 했다. 이를 위해 4차 계획은 성장·형평·능률의 이념 아래 자력 성장구조를 확립하고 사회개발을 통하여 형평을 증진 시키며 기술을 혁신하고 능률을 향상하는 것을 목표로 중화학공업구조조정, 수입자유화와 경제 안정화 정책 등을 주요 추진시책으로 제시했다.

경제기획원은 특히 한국경제의 지속 성장을 위해서는 지난 15년간 추진해온 고도압축성장을 ‘안정성장’으로 바꾸는 경제정책의 기조전환이 필요하다며 ‘경제안정화론’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당시 안정화 정책을 이끈 주역은 1976년부터 4차 계획수립을 총괄한 김재익 경제기획국장을 비롯하여 강경식 기획차관보, 김만제 KDI 원장 등이었다. 이들은 1977년부터 본격적으로 비교우위론을 앞세우며 ‘국제수지 흑자로 발생한 외환으로 농산물을 수입함으로써 통화팽창을 막고 물가안정도 기해야 한다’라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특히 도시노동자 임금인상억제를 위해서 고미가(高米價)정책의 재검토와 농산물 수입자유화가 필요하다고 했다. 경제기획원은 1977년부터 ‘양정(糧政)개혁’에 뒤이어 급진적이고 전면적인 ‘농산물 수입자유화’를 공론화하기 시작했다. 남덕우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은 1977년 12월 10일 한중 경제장관회의 참석차 방문 중인 타이베이에서 기자간담회를 열고 “우리나라 고미가정책은 막대한 재정 부담으로 한계점에 도달했다. 정부는 내년부터 고미가정책을 지양하고 농외소득증대, 축산진흥, 농촌인구 감소 등을 통해 농민소득을 증가시키기 위한 농촌경제구조를 전면 개편할 방침이다”라고 말했다. 남 부총리 발언은 기획원의 안정론자들이 쏘아 올린 농정전환의 신호탄이었다.

나는 1977년 8월 ‘전환기 농정론’이 급물살을 타기 시작할 무렵 귀국하여 국립농업경제연구소에 복직했다. 연구소에는 박사학위를 마치고 복직한 김영식 선배가 있었고 나의 뒤를 이어 주용재 선배가 학위를 마치고 복직하면서 연구소 출신 박사학위 소지자가 3명이 되었다. 추가로 박사과정에 있는 허신행, 강정일 등의 복직이 예상되었다. 박사학위를 취득한 직원을 유지 확보하기 위한 연구소 개편이 불가피해지면서 김동희 기획관리실장은 2년 전에 자신이 추진했던 연구소 재단 법인화를 다시 검토하기 시작했다. 연구소 재단화는 1977년 12월 20일 연구소 개편에 우호적이었던 장덕진 차관이 농수산부 장관에 임명되면서 활기를 되찾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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