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농어민신문]

우농(愚農) 최양부

1986년 2월 12일부터 연말까지 1000만 명 서명을 목표로 시작한 ‘직선제 개헌 1000만 명 서명운동’은 전국의 주요 도시에서 진행되었으며 재야 단체들이 동참하면서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전두환 정부는 직선제 개헌 운동 확산을 차단하기 위해 민추협을 비롯한 재야·학생운동권에 대한 탄압을 다시 강화했다.


1987년 2월 18일 ‘21세기 농정기획반’ 출범으로 ‘21세기 산업사회 농정 비전과 과제’ 수립을 위한 바쁜 나날이 시작되었다. 전체 작업을 5개 부문(여건전망, 농업, 임업, 수산업, 농산어촌)으로 나누고 부문별 작업은 부문별 책임자(최양부 총괄기획, 여건전망과 종합보고서; 이정(貞)환 농업; 이광원 임업; 박성쾌 수산업; 최양부 농산어촌)가 추진한다는 방침을 정했다. 나는 전체 작업의 기획과 진행을 총괄하면서 종합보고서와 농산어촌개발분야 보고서 작성 책임을 졌다. 3월부터 10월까지 2차에 걸쳐 2001년의 농림수산업과 농산어촌의 전망에 대한 농림수산 분야별 전문가와 정부 관계자 632명의 의견수렴을 위한 설문 조사를 추진하는 한편 특별작업 수행에 필요한 부문별 심층연구과제 16건을 선정하여 학계 전문가에게 조사연구를 위촉했다. 나는 종합보고서 작성에 대한 책임 때문에 임업과 수산업에 대한 예비지식을 쌓기 위해 이광원, 박성쾌 실장과 같이 산촌과 어촌 현장을 방문하여 현황을 파악하고 산림과 수산정책과제 등에 대한 조사에 참여했다. 나에게는 산지 자원의 다목적 이용을 위한 임정(林政)과 바다 자원의 합리적 관리를 위한 어정(漁政) 개혁에 눈뜨는 매우 소중한 기회가 되었다. 9월에는 ‘21세기를 향한 한국 농정의 진로와 과제’를 주제로 전문가초청 토론회를 추진하는 한편 부문별 정책개혁과제와 추진방안에 대한 작업 시안을 만들어 11월부터 부문별로 정부와 이해 관계자들과 전문가들을 초청한 심층 토론회를 시작했다. 그렇게 21세기 농정 특별작업에 몰두하는 동안 세상은 1983년 5월 거산(김영삼)의 단식투쟁으로 재점화된 시민항쟁이 4년째 계속되고 있었고 마지막 결전을 향한 혁명전야와 같은 긴장의 날들이 계속되고 있었다.

민추협(김영삼, 김대중 공동의장)과 신민당(이민우 총재)이 1986년 2월 12일부터 년 말까지 1000만 명 서명을 목표로 시작한 ‘직선제 개헌 1000만 명 서명운동’은 전국의 주요 도시에서 진행되었으며 재야 단체들이 동참하면서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전두환 정부는 직선제 개헌 운동 확산을 차단하기 위해 민추협을 비롯한 재야·학생운동권에 대한 탄압을 다시 강화했다. 거산은 아직 사면복권이 안 된 후광(김대중)이 가택연금 되자 시민항쟁의 최선봉에 섰다. 1986년 12월 24일 이민우 신민당 총재가 전두환 대통령, 노태우 민정당 대표와 회담하고 정부가 내놓은 내각제 개헌안을 수용하는 듯한 소위 ‘이민우 구상’을 발표하자 거산은 이에 격분하며 1987년 1월 내각제 거부를 선언하고 신당 창당에 나섰고 신민당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1987년 4월 13일 거산과 후광계 국회의원 70여 명은 신민당을 탈당하여 새로운 ‘통일민주당’을 창당하고 거산을 총재에 추대했다. 거산은 대통령 중심 직선제 개헌을 쟁취하여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룩하고, 군사독재를 종식시키고, 문민정권을 출범시켜 의회민주주의를 수호하겠다며 반독재, 반정부 투쟁을 선언했다. 같은 날 같은 시각 전두환은 1988년 10월로 예정된 서울올림픽대회를 앞두고 개헌 논의는 올림픽 이후로 미루고 제5공화국 헌법에 따라 대통령선거인단 선거를 통해 대통령을 선출하여 1988년 2월 정부를 이양하겠다는 특별선언 (‘4.13 호헌조치’)을 발표했다. 전두환의 호헌선언은 정치권과 시민과 학생들의 저항을 더욱 촉발했다.

1987년 5월 18일, 경찰에 연행되어 조사받다 1월 14일 사망한 박종철(서울대 학생)이 경찰 물고문 도중 죽은 치사사건이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시민과 학생들이 격분했다. 거산은 5월 27일 정부의 4.13 호헌조치를 비판하고 호헌철폐, 독재타도, 직선제 쟁취를 외치며 통일민주당과 민추협, 재야세력이 연합하여 ‘호헌철폐 및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국본)’를 결성하고 6월 10일 국민대회를, 26일에는 ‘민주헌법쟁취 국민평화 대행진’ 개최를 발표했다. 6월 9일 시위 도중 이한열(연세대 학생)이 전투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사경을 헤매는 사건이 또 발생했다. 박종철·이한열의 희생은 타오르는 6.10 시민항쟁에 기름을 부었다.

1987년 6월 10일 ‘박종철 고문살인 은폐조작 및 호헌철폐규탄 국민대회’가 전국적으로 열렸다. 거산은 서울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가는 도중 경찰 저지에 막히자 시민들과 함께 ‘독재타도, 호헌철폐!’를 외쳤다. 1979년 유신독재 시절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오고야 만다”라고 외쳤던 거산은 경찰의 ‘닭장차’에 실려 끌려갔다. 그날 밤늦게까지 시위하다 경찰에 쫓겨 명동성당으로 피신한 시민·학생들의 농성 시위가 6월 15일까지 이어졌고 시민 저항은 더욱 거세졌다. 전두환은 6월 24일 거산에게 긴급 영수회담을 요청했다. 거산은 전두환에게 4.13 호헌철폐를 요구했으나 수용하지 않자 회담 결렬을 선언하고 6.26 평화 대행진 강행 등 대정부 투쟁을 선언했다. 6월 26일 대행진 이후 6월 29일 마침내 전두환·노태우는 시민항쟁에 굴복하고 대통령직선제 개헌을 통한 평화적 정권 이양을 약속하는 담화를 발표했다. 전두환·노태우의 ‘6.29 항복선언’은 1961년 5.16 군사쿠데타로 시작된 군부독재 통치가 26년 만에 막을 내리고 자유민주시대의 새장을 여는 국민승리의 역사적 순간이었다. 이는 1983년 5월 전두환 정권에 생명을 걸고 저항했던 거산의 단식투쟁이 4년 만에 승리를 거두고, 1969년 6월 박정희가 추진하던 3선 개헌에 저항하다 ‘질산 테러’를 당한 거산이 ‘자유민주를 위해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겠다’고 시작한 18년간의 민주화 투쟁이 마침내 이기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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