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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농 최양부의 자전적 농정사] <5>농업경제학에 뜻을 세우고 길을 찾아 나서다-①농업경제학에 뜻을 세우다
   

우농(愚農) 최양부

1993 년 12월 나라의 부름을 받고 농경연을 떠나 출사할 때까지 25년간(1968-1993) 연구소와 농경연은 나의 젊음과 열정을 바친 내 정신의 고향이 되었고, 농가유형론과 농촌정주생활권, 산업사회 농정 패러다임을 생각하는 상상력의 산실이 되었다.


지난 3월 30일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은 개원 40주년(1978-2018)을 기념하는 기념식을 했다. 그러나 농경연은 전신인 농업경영연구소(‘연구소’)와 뒤이은 국립농업경제연구소의 인적, 물적 자원은 물론 사실을 토대로 진리를 탐구하는 실사구시의 연구 정신과 방법론의 전통까지도 계승했기 때문에 일반적 관례에 따라 연구소 설립연도인 1967년을 기준으로 올해는 창립 51주년이다. 더 거슬러 올라가 연구소의 기원이 된 ‘농업경영과’가 처음 설치된 1961년을 기준으로 하면 57주년이 된다. 올해는 개인적으로 학문연구를 통해 우리 농과 농정 발전에 헌신하겠다고 농업경제학에 뜻을 세우고 1968년 3월 서울대 대학원에 진학하여 학문의 길을 걷기 시작한 지 50년(1968-2018)이 되는 해다. 새삼 감회가 새롭다.

농경제학과 4년을 다녔지만 ‘농(업)경제학이란 어떠한 학문이고, 일반경제학과는 무엇이 어떻게 다른지, 농을 위해 어떻게 유용한 학문인지’ 아는 것이 없었고, 학문에 대한 감동도 자긍심도 별로 없었다. 그랬던 내가 대학원에 진학하고 김동희 소장님의 배려로 1968년 2월부터 농업경영연구소 임시연구원이 되어 연구소에 다니면서 대학원 공부를 하게 된 것은 우연이고 행운이었다. 그날 이후 1993년 12월 나라의 부름을 받고 농경연을 떠나 출사(出仕)할 때까지 25년간(1968-1993) 연구소와 농경연은 나의 젊음과 열정을 바친 내 정신의 고향이 되었고, 농가유형론과 농촌정주생활권, 산업사회 농정 패러다임을 생각하는 상상력의 산실이 되었다.

농경연과 전신인 연구소의 역사는 1961년 농사원(농촌진흥청의 전신) 농공이용부에 농업경영과가 처음 설치되면서 시작되었다. 1962년 4월 농촌진흥청이 새로 발족하면서 연구소는 농공이용연구소 소속이 되었다. 진흥청은 1965년 10월 농업경영연구 강화를 위해 농업경영과를 농공이용연구소에서 시험국 소속으로 분리 개편하고 미국 코넬대학교 농과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1965년 6월 귀국한 김동희 지도관을 새 농업경영과장으로 영입했다. 취임 초부터 김 과장은 늘어나고 있는 농업경제연구 수요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독립적인 연구소 설립이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농업경영과를 연구소로 분리 독립하는 작업에 나섰으며 2년의 노력 끝에 1967년 9월 농업경영과를 ‘농업경영연구소’로 독립 승격시키고 초대소장에 취임했다.

김동희 소장은 우리나라 최초의 농업·농촌경제사회 분야 국책연구기관이 된 농업경영연구소를 설계하고 발전의 초석을 놓았다. 그는 연구기반 구축을 위해 인재영입을 추진하는 한편 ‘농업경제강습회’ 등을 개최하여 농업경제연구과제를 정리하고 농업·농 촌실태에 대한 실증적 조사연구방법 등에 대한 교육훈련을 통해 연구원의 연구수행 능력향상을 위해 헌신했다. 그의 노력으로 연구소에는 서중일, 김정배, 김상기, 구천서, 김병도, 이질현, 권택진, 서한혁, 천기길, 한건우, 김정엽, 설인준, 정승래, 정재묵, 김영식, 김인수, 황기현, 국동전, 안창복, 이선정, 양정화 등등 초창기 우리나라 농업경제연구를 이끈 인재들이 대거 포진하게 되었다.

1968년 2월부터 임시연구원으로 연구소 근무를 시작한 나는 선배들로부터 새로운 지식과 연구방법 등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의 사고나 행동은 아직도 대학 시절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연구소에 출근하고 대학원에 다니면서 주말이면 농사단(NSD)의 구윤서 선배 등이 운영하는 안평농민학원(경기도 안성군 소재)으로 내려가 농촌운동을 돕고 대학의 NSD 후배들 모임에도 참석하는 등 ‘삼중생활’을 했다.

7월 중순 NSD 하기 수련대회가 ‘현실 앞에 서자, 역사적 전진을 위하여!’란 주제로 안평농민학원에서 열리게 되고 나는 수련대회를 위한 교재작성 책임을 맡게 되었다. 평소 보던 ‘청맥’ 이란 월간지 등에 실린 정치, 경제와 역사 등에 관한 몇 편의 글을 골라 편집하여 수련대회용 소책자를 만들었다. 수련대회에는 NSD 단원과 초청 강사 등 40여 명이 참석했다.

8월 중순 어느 날 농촌조사를 위해 경기도 고양군 농촌지도소(현재의 시군 ‘농업기술센터’) ‘노승창’ 지도사의 안내를 받아 원당지역의 한 마을에 나와 있었다. 오후 2, 3시경 검정 짚 차 한 대가 나타나 다짜고짜로 나를 태웠다. 도착한 곳은 남산기슭에 자리한 중앙정보부 분실이었다. 수련대회에 참가했던 후배들은 물론 초청 연사들까지 모두 끌려와 조사를 받았다.

당시 정보부는 ‘통일혁명당사건’으로 알려진 간첩단 사건 수사를 마무리하고 있었다. 김종태, 이문규, 신영복 등이 1964년부터 북한의 지령을 받아 남한 사회 교란을 목적으로 지하조직을 설립하고 ‘청맥’지 발간 등의 사업을 추진한 사건을 수사하던 중 NSD 수련대회 교재를 입수했다. 조사관은 NSD와 통혁당과의 관계를 의심하고 그에 대해 캐물었다. 나는 관계가 없다고 답했으나 조사관은 ‘너 빨갱이지’ 하며 윽박질렀고 나는 ‘그렇다’고 응수했다. ‘농대생으로 서울과 수원을 오가며 하루가 멀게 벌어지고 있는 도시와 농촌 간의 불균형을 온몸으로 느끼면서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된 것이고, 이를 바로잡을 방안은 무엇인가를 고민하고 있는데, 이런 생각을 하는 나를 당신이 빨갱이라고 부른다면 나는 빨갱이다’라고 답했다. 이틀 만에 나는 무혐의로 풀려났고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하지만 이 사건은 새삼 나의 연구 자세를 가다듬는 자성과 성찰의 기회가 되었다. 나는 연구소로부터 국가기관에 근무하는 공직자로서 책임 있는 행동을 하라는 주의를 받았다. 무엇보다도 연구자로서 우리 농의 역사적 현실 앞에 어떻게 서야 할지를 고민하게 되었고 연구소 생활과 대학원 공부에 집중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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