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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농 최양부의 자전적 농정사] <3>세상의 소리를 듣고, 세상에 눈을 뜨다/③군정의 ‘중농제일’과 농어촌고리채정리사업
   

우농(愚農) 최양부

군정은 인구의 70%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농민들을 자신들의 정치적 지지기반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정치적 판단 하에 농업·농촌·농민문제에 대한 성찰과 사전준비 없이 인기영합적 정책 사업들을 졸속으로 쏟아내고 강압적으로 추진하면서 많은 시행착오와 부작용을 남겼다. 


1961년 5월 16일 군사쿠데타를 주도한 박정희는 군사혁명위원회라는 초헌법적 국가통치기구를 수립하여 헌정질서를 중단시키고 입법, 사법, 행정의 3권을 장악하면서 군사독재정치를 시작했다. 5월 19일 박정희는 군사혁명위원회를 국가재건최고회의로 개편하고 스스로 의장에 취임하였으며 1962년 12월 26일 자신의 뜻대로 헌법을 개정하고 1963년 12월 17일 대통령에 취임 새 정부를 출범시킬 때까지 2년 반 여 동안 대한민국을 무력으로 통치했다.

5.16 쿠데타 직후 군부세력은 ‘반공을 국시(國是)의 제일의(第一義)로 삼고, 반공태세를 재정비 강화할 것’과 ‘절망과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민생고(民生苦)를 해결하고, 국가 자주경제 재건에 총력을 경주 할 것’ 등을 골자로 한 6개항의 혁명공약을 발표했다. 이어서 군사정부(군정)는 “6.25동란 이후 전쟁수행과 전후복구를 위한 재정 부담을 전적으로 농민에게 지우는 농민수탈정책을 추진했다”고 이승만 정부를 비판하면서 “5할 이자의 장리쌀 빚을 내서 먹고 살며 자녀들을 대학 교육까지 시키느라 쌓인 고리채로 고통을 받고 있는 농민”을 구제하겠다며 ‘중농제일(重農第一)’을 표방하고 나섰다.

군정은 1950년대 나라경제를 농업에 의존하고 있는 농경국가의 현실적 제약 등을 무시하고  이승만 정부의 정책을 비판했다. 그러면서 군정은 농민이 인구의 70%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현실을 고려하여 농민들을 자신들의 정치적 지지기반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정치적 판단 하에 농업·농촌·농민문제에 대한 성찰과 사전준비 없이 인기 영합적 정책 사업들을 졸속으로 쏟아내고 강압적으로 추진하면서 우리 농정에 기여도 했지만 많은 시행착오와 부작용을 남겼다.  

군정은 농어촌 고리채 문제해결을 최우선 과제로 선정하고 5월 25일 농어촌고리채정리령을 발표하고 6월 10일 농어촌고리채법(6월 29일 일부 개정)을 공포했다. 6월 15일에는 농업협동조합과 농업은행의 통합을 전격 결정하고 2개월 후인 8월 15일 새로운 농업협동조합(‘통합농협’)을 출범시켰다. 6월 27일에는 농산물 적정가격 유지를 위해 농산물가격유지법을 제정하고, 8월 31일에는 농업근대화를 위해 수리조합을 합병하였으며, 12월에는 토지개량사업법을 제정하고 토지개량조합과 동 연합회를 설립했다.

1962년 2월에는 개간촉진법을 제정하고 농지확장에 나섰으며, 3월 21일에는 농업연구개발과 농촌지도기능 강화를 위해 농촌진흥법을 제정공포하고, 4월 1일 자로 농사원을 농림부 훈련원과 통합하여 농촌진흥청으로 확대 개편했다. 7월에는 농업구조정책심의회를 설치하고 농업구조혁신을 위해 농업협업화시범사업으로 전국에 5개 협업농장 (경기 광주, 전북진안 운장산, 전남광양 백운산, 경북월성 박달, 경남양산 대리)을 개설했다. 나는 농장설립 4년 뒤인 1966년 대학 3학년 여름방학 동안 협업농업에 대한 관심 때문에 운장, 백운, 대리 등 3개 농장을 방문하고 한 곳에서 일주일 정도 머물며 협동농장생활을 직접 체험해 보기도 했다. 

군정은 1961년 5월 25일 농어촌 고리채 정리 사업을 추진을 전격 발표했다. 그날 정오를 기준으로 농가부채를 동결하고 그 이전까지의 부채가운데 연리 20%이상의 현금 및 현물부채를 고리채로 규정하고 가구당 원금 1만5000원(6.10 화폐개혁 전 15만환)까지 신고하도록 했다. 그 결과 48억여 원이 신고 되었으며, 그 가운데 29억여 원이 고리채로 최종 판정되었다. 

그러나 농협중앙회 (8.15 통합 전 농업은행) 는 정부 지원 자금 부족으로 24억여 원에 대해서만 연리 20%의 농업금융채권을 발행하여 고리채를 대신 갚아주었다. 채무자는 연리 12%의 정부융자(1년 거치 4년 상환)를 받아 연차적으로 변제금액을 농협중앙회에 상환했으며 나머지 연리 8%에 대해서는 국가가 부담했다. 그러나 5년 후 일부 채무농가들이 상환 약속을 지키기 않아 10억여 원의 미회수 채권이 발생하자 정부는 1969년 8월 4일 농어촌고리채정리법 중 변제의무에 관한 특별조치법을 제정하여 농협중앙회로 하여금 일부 농가들이 상환하지 않은 미회수 채권을 회수 불능채권으로 손실 처리하여 탕감조치 하도록 하고, 1970년 9월까지 농협중앙회에 원금과 이자를 보상해 주면서 고리채 정리 사업을 10년 만에 종결하였다.

군정은 고리채정리 사업을 불규칙하게 수입이 발생 차입에 의존해야 하는 농가경제의 특성과 농촌 사(私)금융의 순 기능을 이해하지 못하고, 감성과 의욕을 앞세워 농촌 사금융업자들을 악덕 고리대금업자로 매도하면서 강압적으로 무리하게 추진하여 그들의 일방적 희생을 강요 했다고 자평했다. 더욱이 신고 된 고리채의 51%가 농가의 관혼상제비, 교육비, 기타 잡비 등 생산적 부채가 아닌 소비적 부채가 많았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고리채정리 사업이 사회적 타당성을 결여한 정치적 인기영합 정책이었음을 드러냈다. 그 때문에 정리 당시 80억 원으로 추산되었던 농어가 부채규모는 5년 후에는 오히려 250억 원 규모로 늘어났으며 이는 농가의 고리채 누적의 악순환 구조를 혁신시키는 근본적인 소득증대정책을 추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군정은 고리채 정리 사업을 국가재건최고회의의 농가부채에 대한 무지와 졸속, 전시행정의 대표사례로 평가하고 정책실패를 자인했다. 이 사업은 농정에 심각한 후유증을 남겼다. 특히 정부 융자대출 자금 등 부채를 제 때에 갚지 않아 부채가 누적되면 선거철을 맞아  부채탕감을 요구하는 농민들의 ‘도덕적 해이’를 낳았고, 정치인들로 하여금 농민 표를 얻기 위한 인기 영합적 정치공약으로 활용하게 하는 나쁜 관행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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