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농(愚農) 최양부

농민들은 1978년 이후 급진적인 농정전환과 자연재해 등으로 발생한 농민피해보상에 대한 정부와 농협의 무책임한 정책추진에 대해 분노하고 항의하기 시작했다. 농민들이 쌀값 생산비 보장, 농산물수입개방반대, 강제농정철폐, 농협 조합장직선제 등을 외치며 유신독재에 저항하는 민주화운동에 동참하게 되면서 새마을운동은 농민적 지지기반을 잃고 추동력을 상실했다.


1970년대 농촌근대화를 이끌었던 새마을운동이 박 대통령 서거와 함께 일순간에 무너진 것은 무엇 때문인가? 박정희라는 새마을운동을 주창하고 이끈 정치지도자를 잃은 것은 운동의 추동력을 상실케 한 주요요인이다. 그러나 새마을운동이 1970년대를 관통하여 장기간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유신 독재정권의 강요된 동원을 넘어 자발적으로 참여하고 적극적으로 호응한 남녀 새마을지도자를 비롯한 마을주민, 지방공무원과 농협 임직원 등이 있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박 대통령 서거 이후 그들의 참여 의지와 에너지를 빼앗고 새마을운동을 무너지게 만든 다른 요인들이 있어야 한다. 그것은 강제 동원에서 오는 누적된 피로감을 뛰어넘는 보다 근원적이고 구조적인 요인이어야 한다. 나는 ‘새마을운동의 성공이 바로 운동의 지속가능성을 제약하는 구조적 요인이며 새마을운동은 농촌발전모델로서 지속하기 어려운 시대적 한계에 봉착하게 된 것이 아닌가?’라는 의문을 가지고 운동이 당면한 문제와 발전 방향에 대해 생각했다.

첫째 새마을운동은 급격한 산업화의 충격으로 농경사회가 해체되고 도시산업사회로 전환하고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체제로 바뀌는 전환시대에 대한 적응력을 가지지 못했다. 농가 인구는 이촌향도(移村向都)가 계속되면서 1971년의 1471만 명에서 1979년 1088만 명으로 줄어들었다. 마을의 잠재실업 인구가 소진되면서 농업노동력 부족이 나타나고 농촌 노임이 상승했다. 농업은 시장판매를 목적으로 하는 상업농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10여 년을 지속해온 마을발전을 위한 무상의 노동력 봉사와 땅의 희사 등의 요구는 농민부담이 되었다. 마을 중심의 집단적 사업추진방식은 시장화, 개인화되고 자유화, 민주화되고 있는 새로운 정치·경제 질서 속에서는 지속 가능한 모델이 아니다. 새마을운동은 스스로 시대적 한계를 드러내고 있었다.

둘째 새마을운동의 성공을 가져온 ‘마을 기반 추진전략’ 그 자체가 구조적 제약요인이 되었다. 1973년부터 마을간 경쟁이 본격화되면서 마을주민들의 자발적 참여로 1978년 이후 마을 대부분이 새마을사업목표를 성공적으로 달성하여 최고 등급인 자립마을에 도달했다. 그러나 마을발전으로 주민 숙원이 이루어지면서 운동참여 동기를 부여하는 유인요인들이 사라지게 되면서 운동은 목표를 잃게 되었다. 특히 마을주민들의 새로운 사회 문화적 수요와 기대 욕구는, 예를 들면 교육, 의료, 복지, 문화 등은 마을에서는 충족하기 어려운 것들이다. 이를 충족하기 위해서는 면 소재지나 읍, 시(市)급 농촌 중심도시가 마을주민을 위한 서비스 센터로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농촌 중심도시개발과 같은 새로운 농촌 지역개발전략이 필요하다.

셋째 새마을운동의 성공으로 농촌환경개발, 주곡자급달성, 농가소득증대 등의 정책목표가 달성되자 정부는 1977년 제4차 5개년계획 시작과 함께 ‘농정전환론’을 제기하며 새마을운동을 떠받쳐온 친 농민적 고미가정책을 중단하고 친 소비자의 물가안정을 위한 비교우위론에 입각한 농산물수입 자유화 정책을 추진했다. 1978년 2월에는 ‘농산물수입 자유화 기본방침’을 확정하고 1978-79년간 3차례에 걸쳐 소고기, 돼지고기를 비롯하여 고추, 마늘, 양파 등에 대한 수입자유화 조치를 단행했다. 농민은 정부의 급진적인 반 농민적 농정전환에 충격을 받았고 1978년 가뭄과 1980년 냉해 등의 자연재해로 인한 소득저하와 부채증가로 정부에 대해 배신감마저 가지게 되었다. 그동안 구축된 농민, 새마을지도자와 공무원, 농협과 대통령 간의 신뢰가 무너지면서 잠재되었던 정부와 농협에 대한 분노와 불만을 표출하기 시작했다. 특히 주곡 증산 농정 수행과정에서 농민의 품종선택권을 박탈한 ‘강제농정’과 강압적인 지붕개량 등 ‘전시행정’에 대한 불만, 조합원의 이익보다 새마을운동에 앞장선 임명직 농협 조합장의 관료적 행태에 대한 불만 등으로 농민과 정부와 농협 간의 갈등이 폭발하면서 새마을운동은 추진세력간 갈등과 분열로 구심점을 잃고 스스로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새마을운동이 이룩한 최대 업적은 농민들의 ‘할 수 있다’는 자조 정신과 단체활동능력을 배양시킨 것이다. 마을사업추진을 위한 주민총회와 민주적 의사결정 등 ‘마을 민주주의’의 훈련을 통한 민주 의식 함양으로 농민들은 스스로 자신들의 권익을 지키기 위해서는 관(정부와 농협 등)의 부당한 처사에는 항의해야 한다는 주권의식도 자각하게 되었다. 새마을운동과 함께 전화와 전기의 농촌보급이 확대되고 통신, 라디오, TV 등의 농가 보급이 빠르게 이루어지면서 도시와 농촌 간 정보 격차축소로 농민이 정보고립 현상에서 벗어났고 농민 간의 신속한 소통도 가능해졌다. 농민들은 1978년 이후 급진적인 농정전환과 자연재해 등으로 발생한 농민피해보상에 대한 정부와 농협의 무책임한 정책추진에 대해 분노하고 항의하기 시작했다. 농민들이 주권과 권익쟁취를 위한 투쟁에 눈을 뜨면서 농민운동은 전국으로 빠르게 퍼져나갔다. 농민들이 쌀값 생산비 보장, 농산물수입개방반대, 강제농정철폐, 농협 조합장직선제 등을 외치며 유신독재에 저항하는 민주화운동에 동참하게 되면서 새마을운동은 농민적 지지기반을 잃고 추동력을 상실했다. 나는 급격한 산업화의 충격으로 새롭게 형성되고 있는 도시산업사회에 대응한 농촌경제사회와 농민의식변화로 나타난 새마을운동의 구조적 문제와 시대적 한계를 보게 되었고 1980년대를 향한 새 농정패러다임과 농촌발전전략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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