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농어민신문]

우농(愚農) 최양부 

87 헌법은 1948년 제헌 헌법이 천명한 대한민국 건국 이념인 자유, 대의, 입헌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주의, 법치주의, 세계평화주의를 대한민국의 헌법적 기본가치로 재확인하고 오늘까지 32년간 수호해 오고 있다.


대한민국은 1987 헌법을 개정함으로써 마침내 ‘87 체제’라는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체제를 제도적으로 확립하고 자유민주의 나라로 거듭 태어났다. 87 헌법은 1948년 제헌 헌법이 천명한 대한민국 건국 이념인 자유, 대의, 입헌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주의, 법치주의, 세계평화주의를 대한민국의 헌법적 기본가치로 재확인하고 오늘까지 32년간 수호해 오고 있다.

여야(민주정의당과 통일민주당)는 8월 3일부터 ‘8인 정치회담’을 열고 헌법 개정작업에 착수했다. 여야는 19차에 걸친 회담 끝에 8월 31일 헌법개정안을 만들었다. 여야는 국민의 열망을 담아 대통령 5년 단임 직선제와 국민의 자유의사로 대통령을 선출하고 평화적으로 정부 또는 정권을 교체할 수 있게 하는 새로운 헌법개정안을 만들었다. 이 합의안을 넘겨받은 국회 헌법개정특별위원회는 9월 17일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하고, 10월 12일 여야 만장일치로 헌법개정안을 의결했다. 헌법개정안이 10월 27일 국민투표에서 과반수 찬성으로 확정되자 정부는 10월 29일 소위 ‘제6공화국 헌법’을 공포했다. 이로써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시대를 다시 열었다.

87 헌법은 대한민국은 3·1운동으로 건립된 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이념을 계승하고, 정의와 인도, 자율과 조화를 바탕으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더욱 확고히 하는 민주공화국임을 선언했다. 대한민국의 국민은 천부적 인권과 존엄을 가진 독립된 인간으로 행복을 추구할 자유와 권리를 가지며, 국가는 개인이 가진 불가침의 자유와 기본 인권을 보장할 의무를 진다. 국민의 모든 자유와 권리는 국가안전 보장, 질서유지, 또는 공공복리를 위하여 필요한 경우 제한할 수 있으나 그 경우에도 자유와 권리의 본질적 내용을 침해할 수 없다. 모든 국민의 재산권은 보장되나 재산권 행사는 공공복리에 적합하도록 해야 한다.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성을 보장하고, 정당의 목적이나 활동은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위배해서는 안 되며,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평화통일을 추구한다고 선언했다.

국회의원은 현행범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회기 중에 국회의 동의 없이 체포 또는 구금되지 아니하며, 국회에서 직무상 행한 발언과 표결에 관하여 국회 외에서 책임지지 아니한다. 국회는 국정을 감사하거나 특정한 국정 사안을 조사할 수 있다. 대통령은 국민의 직접선거로 선출되며 임기는 5년 단임으로 하고, 국가의 계속성과 헌법을 수호할 책무를 진다. 대통령 등 법률이 정한 공무원이 헌법이나 법률을 위배한 때는 탄핵 소추를 의결할 수 있다. 헌법재판소는 법률의 위헌 여부, 탄핵, 정당 해산, 권한쟁의, 헌법소원에 관해 심판한다.

대한민국의 경제 질서는 개인과 기업의 경제상의 자유와 창의를 존중함을 기본으로 한다. 국가는 균형 있는 국민경제의 성장 및 안정과 적정한 소득의 분배를 유지하고, 시장의 지배와 경제력 남용을 방지하며, 경제주체 간의 조화를 통한 경제 민주화를 위하여 경제에 관한 규제와 조정을 할 수 있다. 국가는 농지에 관하여 경자유전(耕者有田)의 원칙이 달성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며 농지의 소작(小作)제도는 금지되나 농업 생산성의 제고와 농지의 합리적인 이용을 위해 농지의 임대차와 위탁경영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인정된다. 국가는 농어업을 보호 육성하기 위하여 농어촌종합개발 지원 등 필요한 계획을 수립 시행하여야 하고, 농산물의 수급균형과 유통구조의 개선에 노력하며 가격안정을 도모함으로써 농어민의 이익을 보호하고 농어민과 중소기업의 자조조직을 육성하되 그 자율적 활동과 발전을 보장한다.
그러나 국민의 관심은 1987년 헌법의 가치와 이념보다는 새로운 자유민주시대를 열어나갈 대통령으로 누구를 뽑을 것인가, 누가 될 것인가, 누가 되어야 하는가에 쏠렸다.

대선 승리를 위해서는 거산 김영삼과 후광 김대중의 후보 단일화가 절실했다. 거산은 재야의 전통적 보수우파와 진보적 보수의 지지를 받았고, 후광은 후보 단일화를 반대하고 후광에 대해 ‘비판적 지지’를 선언한 진보적인 좌파 시민단체와 친북적인 운동권 학생단체 등 27개 단체 연합체인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 의장 문익환)’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양김 간 후보 단일화를 위한 막판 협상이 치열했다. 후광은 1987년 10월 20일 밤 단일화를 위한 마지막 마라톤협상 도중 협상을 중단하고 협상장을 떠나면서 단일화는 물거품이 되었다. 후광은 10월 29일 ‘평화민주당’을 창당하고 ‘4자필승론’을 내세우며 대선 출마를 선언했다. 후광은 경북(TK) 노태우, 경남(PK) 김영삼, 충청 김종필로 전국이 3분 되면 자신은 텃밭인 호남과 강원, 수도권 진보세력의 지지를 받아 승리가 확실하다고 했다. 후광은 정치공학적 판단으로 우리나라 정치플랫폼을 그동안의 ‘독재 대 민주’에서 ‘지역+이념’으로 바꾸고 ‘지역패권주의’를 확립하고, 경상과 충청은 기득권 보수지역으로 호남과 수도권은 개혁적 진보지역으로 지역에 이념을 색칠했으며 진보를 넘어 주사파 등 친북적 좌파세력의 정치적 기생처(寄生處)가 되었다.

선거결과는 노태우 후보의 대통령 당선이었다. 거산과 후광의 분열은 자유민주시대를 갈망한 국민에게 참담한 패배를 안겨주며 군부세력의 재집권을 초래했다. 1987년의 시대정신인 군정 종식과 자유민주시대를 여는 문민정부 출범은 5년을 더 기다려야 했다. 거산과 후광은 정치적 경쟁자가 되어 대한민국 정치지형을 수구적 보수와 중도적 개혁 보수, 좌파적 급진 진보로 개편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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