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농(愚農) 최양부

1949년 6월 21일 이승만 정부는 ‘농지는 농민에게 분배 한다’는 제헌헌법의 경자유전(耕者有田)과 자유시장경제의 원칙에 따라 농사짓는 농민 1인당 3정보 소유상한과 ‘유상몰수, 유상분배’를 골자로 하는 ‘농지개혁법’을 제정 공포했다.


대한민국은 한반도 역사상 최초의 자유민주선거인 1948년 5.10 총선거에 참여하여 투표한 749만 명(1946년 8월 30일 기준 총인구 1920만 명 중 유권자 총 784만 명)의 국민이 선출한 이승만, 신익희, 조봉암, 장면, 허정 등 200명의 제헌국회의원과 한반도 남쪽에 단일 독립국가 수립을 지지하고 참여한 김성수, 장덕수, 조병옥, 윤보선, 등 86만여 명(1947년 말)의 한국민주당 당원을 비롯한 우익진영 인사들의 축복을 받으며 1948년 8월 15일 태어났다.

그러나 해방정국을 이끌었던 또 다른 지도급 정치인들로부터는 축복받지 못한 탄생이었다. 누구보다도 김구(우파)와 김규식(중도우파)을 비롯한 여운형(중도좌파), 김일성과 박헌영(좌파 공산당) 등 좌·우·중도합작세력이 격렬하게 총선거를 거부하고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했기 때문이다.

김구는 “나는 통일정부를 세우려다가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의 구차한 안위를 위해서 단독정부를 세우는 일에는 가담하지 않겠노라”라고 했다. 그는 이승만을 위시한 총선거와 건국에 참여한 정치 지도자들과 국민 모두를 ‘일신의 구차한 안위’를 위한 사람으로 매도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반대세력에 맞서며 대한민국 건국을 끝내 이루어냈다.

1949년 6월 미군이 완전 철수한 뒤 대한민국은 자주독립국가로서 면모를 갖추기 위해 안간 힘을 쓰고 있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1948년 9월 제헌국회에서 행한 시정연설에서 초대정부의 2대 과제로 농지개혁과 농업협동조합 조직을 제시하고 좌파 정치인이었다가 전향하고 건국에 참여한 조봉암을 초대 농림부 장관에 임명하고 입법화에 나섰다. 조 장관은 2대 과제 추진을 위한 법률안을 만들었으나 협동조합설립 건은 부처 간 의견대립으로 국무회의 논의단계에서 유보되었고, 농지개혁법만 국회에 제출되어 입법화 되었다.

1949년 6월 21일 이승만 정부는 ‘농지는 농민에게 분배한다’는 제헌헌법의 경자유전(耕者有田)과 자유시장경제의 원칙에 따라 농사짓는 농민 1인당 3정보 소유상한과 ‘유상몰수, 유상분배’를 골자로 하는 ‘농지개혁법’을 제정 공포했다. 정부는 1950년 2월 3일부터 농가별 분배농(60만4867정보) 일람표를 작성 분배를 확정하고, 4월 15일까지 농지개혁을 완료했다.

그로부터 2개월여가 지난 1950년 6월 25일, 내가 5살 되던 해, 북한은 미군철수로 군사적으로 취약해진 남한을 적화통일하기 위해 소련과 중국의 지원을 받아 남침했다. 1953년 7월 27일 휴전될 때까지 3년여 간 한반도는 초토화되었다.

6.25동란은 미군을 비롯한 16개국 참전 유엔군을 포함한 군인과 경찰, 민간인 등 수백만 명의 사상자를 낳았고, 1000만명이 넘는 이산가족과 전쟁고아를 만들었다. 대한민국은 1953년 1인당 국민소득 67달러로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가 되었고 국민들은 절망의 땅에서 춥고 배고픈 한겨울을 살아야 했다.

그러나 70년이 지난 2018년 오늘 대한민국은 제2차 세계대전이후 탄생한 신생국가들 가운데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이룩하고 정보화를 선도하는 1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의 나라가 되었다. 세계에서 인구 5000만 명이상으로 국민소득 3만 달러가 되는 나라로는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일본에 이어 7번째다. 대한민국이 이렇게 된 것은 1950년대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기 위한, 당시 전체인구의 70%가 넘는, 농민들의 노력과 헌신이 있었고 그들에게 희망을 안겨준 농지개혁이 있었다. 농지개혁은 절망의 땅에 희망의 불씨가 되었다.

이승만 정부는 ‘유상몰수, 유상분배’ 방식으로, 북한은 ‘무상몰수, 무상분배’로 농지개혁을 했다. 이를 두고 일부에서는 남한의 농지개혁은 북한에 비해 ‘농민적이지 못한 실패한 개혁’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역사의 실체적 진실을 왜곡한 것이다. 북한은 농지를 국유화하고 경작권만 무상으로 분배했다가 이마저 회수하여 집단농장에 귀속시켜 농민을 농지 없는 농업노동자로 만든 반농민적 개혁이었다. 1948년 12월 4일 이승만 대통령은 라디오연설에서 북한의 농지개혁은 ‘나라가 지주들의 땅을 빼앗아 대지주가 되고, 농민은 영구히 나라의 소작인이 되어, 나라의 노예가 될 것이다’라고 비판했는데 역사는 결국 그의 말대로 되었다.

반면, 남한은 농지에 대한 영구적인 농민적(사적) 소유권을 확립하여 자유롭게 내 농사를 짓는 가족(자작)농을 창설한 농민적 개혁이었으며,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와 자유시장경제의 초석을 놓은 역사적으로 성공한 개혁이었다. 더욱이 농지개혁과 6.25전쟁은 한국사회의 고질적인 봉건적 지주제를 해체하고 부유층 등 기득권층을 붕괴시켰다. 1950년대 대한민국은 모두가 가난한, 그래서 누구나 열심히 노력하면 잘살 수 있는 희망이 있는 자유평등사회였다.

농민들은 한반도 5000년 역사상 처음으로 땅문서를 받고 ‘내 땅’을 갖게 되었고 봉건적 지주제의 질곡에서 해방되어 미래에 대한 새 희망을 갖게 되었다. 농민들은 그 희망을 지키고 현실로 만들기 위해 전쟁 중에는 공산화위협에 맞섰고, 전후복구를 위한 재정을 감당하는 수탈을 당하면서도 자녀들 교육에 헌신하여 그들을 대한민국의 희망의 새싹으로 길러냈다.

2018년 헌법개정 논의가 시작되면서 헌법의 경자유전조항은 이제 시대적 역할을 다 했으니 삭제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그러나 이는 경자유전원칙이 지난 70년간 농지를 국민식량안보를 위한 최소한의 국가자산으로 보전하는 역할을 해온 것을 간과한 말이다. 경자유전은 죽은 조항이 아니라 살아서 이나마 농지를 지키고 있다. 만약 이 조항마저 헌법에서 사라진다면 대한민국 농지는 그 순간 부동산으로 전락하고 식량안보를 위한 최소한의 농지기반마저도 잃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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