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농(愚農) 최양부 

잘못한 일이 생기면 언제나 잘못을 그 자리에서 지적하고 시정을 요구하시는 아버지의 말씀은 나를 구속하는 잔소리로 여겼다. 부자간에 항상 긴장감이 감돌았다. 아버지의 사랑을 메말라 했으면서도 그런 아버지에게 나는 반항적이었다.


“우리는 피 끊는 학생이다. 오직 바른 길만이 우리의 생명이다.” 1958년 광주서중학교 (‘서중’)에 입학하면서부터 등하교 때 마다 하루 두 번 학교 정문 왼쪽에 우뚝 서있는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탑에 새겨진 비문을 읽었다. 그렇게 중고시절 6년(1958-1963)을 보내는 동안 비문의 글은 나에게 말을 걸어왔고 내 마음에 들어와 정신이 되었다. 세월이 흘러 세상을 살면서 차츰 나는 내가 걷는 길이 바른 길인지를 의식하기 시작했다.  

서중에 입학하던 해 다섯 살 위인 큰 형(양재)은 광주제일고등학교(‘일고’)를 졸업하고 ‘서울대 상대 경제학과’에 입학하여 서울로 떠나게 되었고, 세 살 위인 작은 형(양우)은 일고에 입학했다. 3년 후 나도 일고에 진학했다. 내가 국민학교를 1년 늦게 들어가는 바람에 그렇게 되었다. 누나(양의)는 전남여고를 나와 ‘전남대 공대 섬유학과’에 다니고 있었다. 어머니는 누나와 세 아들의 교육비부담 때문에 광주시내 금남로에 있던 집을 팔아 계림동에 있는 작은 집으로 이사하셨다. 서중학생이 되던 날이다. 어머니는 자식들의 학비마련과 가족들의 생계를 위해 집 판돈으로 장사를 시작하셨다. 서울과 부산, 대구를 오가며 포목이나 잡화 등을 도매가로 사다가 광주시내 중심가인 충장로에 있는 소매점들에 넘기는 장사였다. 형과 나는 물건을 가게에 배달하고 외상대금을 받으러 다녔다. 안정된 고정수입이 없는 탓에 가정경제는 하루하루가 불안한 생활의 연속이었다. 중고생 때에는 수학여행을 가거나 졸업 앨범을 살 엄두조차 못 냈다. 생활에 대한 작은 불평도 사치였다.

1959년 중학교 2학년 가을, 한창 사춘기를 겪고 있을 때, 아버지가 옥고를 치르시고 집으로 돌아오셨다. 5살 때 헤어졌다가 10년 만에 아버지를 다시 만났다. 그토록 보고 싶고 기다리던 아버지였지만 막상 만나니 어색했고 좀체 다가 설수가 없었다. 명랑하게 뛰놀며 국민학교 시절을 보내다 아버지와 같이 생활하는 것이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아버지의 집중적인 관심을 받는 것이 싫었다. 잘못한 일이 생기면 언제나 잘못을 그 자리에서 지적하고 시정을 요구하시는 아버지의 말씀은 나를 구속하는 잔소리로 여겼다. 부자간에 항상 긴장감이 감돌았다. 아버지의 사랑을 메말라 했으면서도 그런 아버지에게 나는 반항적이었다. 중고시절 나는 국민학생 때의 명랑함을 잃어버린 내성적이고 소극적인 청소년이었다.

그렇게 자라면서 매년 연말이 되면 무릎을 꿇고 아버지 앞에 앉았다. 아버지는 지난 1년을 어떻게 살았는지, 새해를 맞이하는 각오와 계획이 무엇인 지를 물으셨다. 무어라 답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다리가 저렸던 기억만은 아직도 생생하다. 아버지는 주체적으로 자신의 생활을 설계하고 실천해 나가는 ‘과학적 생활태도’를 가지라고 하셨다. 나라와 민족, 역사이야기며 세계이야기도 해주셨다. 아버지는 사회적 약자나 어려운 사람을 생각하고 도우며 보람 있고 의미 있게 사는 삶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하셨다. 나는 어느 해 부터인가 새해가 되면 실천해야 할 목표를 세우고 생활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아버지 말씀은 가슴에 들어와 나를 이끌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어린 내가 넘어야 할 정신의 산이 되셨다. 

청소년시절 나는 터울이 긴 두 형들과 그렇게 살가운 사이가 아니었다. 특히 3형제가 각각 중-고-대학생이 되면서부터는 더욱 그렇다. 1961년 일고에 진학할 때 작은 형도 ‘연세대 공대 전기공학과’에 입학하여 서울로 떠나면서 형들과의 관계는 한층 더 소원해졌다. 누나와 여동생(양민)과도 마찬가지였다. 누나는 대학졸업 후 국립섬유시험연구소에 취직이 되어 서울로 갔고, 누이동생은 숙명여고에 진학하면서 서울로 갔다. 5남매 가운데 홀로 집에 남아 아버지, 어머니, 할머니와 생활하다 1964년 ‘서울대 농대 농경제학과’에 입학하면서부터 나대로의 길을 찾아 나서게 되면서 광주에서의 청소년 시대 18년(1945-1963)을 마감하게 되었다. 3년 후에는 부모님도 서울로 이사를 하시게 되자 광주는 나에게서 점점 멀어져 갔고 청소년 시절의 가슴시린 날들에 대한 기억을 간직한 추억의 도시가 되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버지는 한참 사회활동을 할 수 있는 40대부터 1972년 62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하실 때까지 날개 꺾인 독수리가 되어 옥고와 칩거의 삶을 사셨다. 아버지의 일상은 규칙적이고 반듯했고 자신에 엄격했으며, 논리적이고 이성적이었고 카리스마가 넘치셨다. 그는  시간을 쪼개 빈틈없이 쓰셨고, “하루하루, 매 시간, 한 순간에도 최선을 다하라”를 몸으로 보여 주셨다. 특히 ‘에스페란토(Esperanto)’ (나라마다 언어가 다른 세계인의 자유로운 의사소통을 위해 폴란드 의사 자멘호프 박사가 창안한 공용어) 한글사전 만들기에 집중하시면서 가정경제를 꾸리기 위해 장사를 하시는 어머니를 조용히 뒷바라지 하셨다. 그 시절 부엌일도, 심지어 설거지도 마다하지 않으셨으며 개방적이셨고 남녀평등을 몸소 실천하셨다. 

나는 고등학생이 된 이후 중학시절의 어두웠던 표정은 다소 밝아졌고, 학교생활도 활발해 졌다. 일고 1학년 때 만나서 평생의 지기가 된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무등산 등산도 하면서  호연지기를 기르기도 하고 학교 연극반에 들어가 전국 중·고등학생연극제에 출전 우승하였으며 ‘할머니’역을 연기한 나는 연기상을 받기도 하였다. 고2 때는 도서관에서 책 대출과 정리 등의 일을 하며 많은 책을 빌려 읽기도 했다. 하지만 경제적으로 어려운 나의 처지에 대한 불만은 쌓이고 아버지와의 사이에 긴장감도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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