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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농 최양부의 자전적 농정사] <3>세상의 소리를 듣고 세상에 눈을 뜨다-⑤정부는 국민을 굶기지 않도록 책임을 다하겠다
   

우농(愚農) 최양부

1962~1963년 대흉작으로 식량부족사태가 발생하고 곡가가 폭등하자 언론들은 ‘해방 후 일찍이 없었던 살인적인 쌀값이 국민을 절망케 하자, 농림부 장관이 물러나고, 주미 한국대사는 미국에 잉여농산물을 구걸하는 처지가 되었다’고 보도했다.


1961년 6월 1일 군정은 시급한 민생고(民生苦)의 해결과 자주경제 재건이란 혁명공약의 실천을 위해 식량증산 등 근본적인 농어촌 진흥대책과 자립경제 구축을 위한 장기종합개발계획 수립 등을 주요 골자로 하는 경제정책의 기본 방향 및 시책을 발표했다. 7월 22일에는 경제기획원을 설립하고, 국가경제의 자립 성장과 공업화 기반 조성의 2대 목표와 농업부문의 중점개발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한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1962~1966) 1차 계획 시안을 발표했다.

군정은 1차 계획안에 대한 각계 의견 수렴을 거쳐 11월 7일 최종안을 확정한 후 1962년 1월 5일 발표했다. 1차 계획의 성공적 추진을 위해서는 필요한 투자 재원의 확보가 시급했다. 군정은 이를 위해 미국과 일본, 독일 등 해외로 부터 차관 도입을 하는 등 경제 협력 지원을 얻어내야만 하는 현실에서 미국과의 관계 정상화가 시급했다. 한국은 1960∼1961년간 4월 혁명에 의한 이승만 정부의 붕괴와 장면 정부의 집권에 이어 5.16 군사쿠데타로 장면 정권이 붕괴되고 자유민주주의 질서가 무너지는 정치적 역행(逆行)으로 미국과 여러모로 불편한 관계가 형성되었다.

박정희 군사정권은 미국의 불신을 해소하는 한편 미국의 무상원조(잉여농산물) 감소로 인한 국방비 부담증가와 식량부족 문제를 최우선으로 해결해야만 했다. 이를 위해 박정희 의장은 1961년 11월 12일부터 25일까지 미국과 일본을 차례로 방문했다. 11월 12일 일본을 방문한 박 의장은 이케다 하야토 일본 총리와 정상회담을 갖고 국교 정상화와 경제협력 방안에 대해 협의했다.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11월 14~15일간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을 방문하여 두 차례 정상회담을 하였으며 러스크 국무장관, 프리맨 농무장관과 별도 회담을 갖고 1차 계획에 필요한 1억7800만 달러 규모의 차관과 경제 원조를 요청했다. 박 의장은 1960년부터 무상원조 감소로 인한 군사비부담 증가 때문에 한국군의 현상유지가 어렵다며 무상원조 증액을 요청했다. 박 의장은 그 대신 1963년까지 군정종식을 약속하고, 미국이 필요한 경우 한국군을 월남전에 파병할 수 있다는 제안을 하며 미국 측을 설득했다.

이러한 회담과정을 거쳐 한·미 양국 정상은 “우리는 모든 가능한 경제원조와 협력을 계속 하겠다”는 공동성명을 채택했다. 이로써 박 의장은 케네디 대통령의 지원 약속을 받아내면서 군정에 대한 미국의 불신을 해소하고 한·미관계를 정상화 시키는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고  군정의 1차 계획 추진은 탄력을 받게 되었다.

중농제일을 표방했던 군정은 1차 계획에서 공업제품에 대한 내수시장 확대는 물론 공업원료의 원활한 공급을 위한 식량증산과 농촌소득 증대 등 농촌 부흥을 농정목표로 정하고 1차 계획기간 동안 쌀은 1960년 기준 1595만석에서 1966년까지 2057만석으로 29.0%, 보리는 721만석에서 848만석으로 17.6% 늘리는 증산목표를 세웠다. 이를 위해 개간, 간척 사업을 통한 12만 정보의 농지를 확장하고, 수리 안전답 확대와 시비개선, 농사기술 개발을 통한 단위 면적당 수확량 증대 등을 추진하고 농사시험과 지도사업을 강화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또한 농업생산을 쌀·보리중심에서 잠업, 인(홍)삼, 면화, 축산 등으로 다변화 시키고 수출 산업으로 육성하여 외화 획득을 한다는 목표도 세웠다. 낙농 진흥을 위해 젖소 5000두를 도입하고 산지 초지 개발계획도 세웠다. 농림부는 1차 계획의 목표 달성을 위해 곡류, 원예작물, 특용작물 증산을 주 내용으로 하는 ‘제3차 농업증산5개년계획(1962~1966)’을 별도로 수립했다.

군정은 이상의 계획목표 달성을 위해 향후 추진할 6가지 중점 농정시책으로 ‘1) 전 농촌을 지역별로 구분하여 농업경영의 유형에 따라 지역농정을 수립하고 적정규모의 자립안정농가 창설과 유지에 주력하고, 2) 신경지 및 목야지 조성, 3) 농산물 적정가격 보장과 영농자금 및 비료보상금 확보, 4) 축산업 기업화 촉진과 가공처리 적극 육성, 5) 임산자원 조성과 황폐 임야의 복구 촉진,  6) 농정의 민주화와 농업단체의 민주적 관리’ 등을 제시했다.

하지만 군정의 농업증산 정책은 시작부터 발목이 붙잡혔다. 1962년 대 가뭄으로 쌀 생산량이 전년대비 15.7%나 감소하는 대 흉작이 들고 이어서 1963년 여름 보리 생산마저 흉작이 들면서 극심한 식량 부족사태가 발생하고 곡가가 폭등했기 때문이다. 언론들은 ‘해방 후 일찍이 없었던 살인적인 쌀값이 국민을 절망케 하자, 농림부장관이 물러나고, 주미 한국대사는 미국에 잉여농산물을 구걸하는 처지가 되었다’고 당시 상황을 보도했다.

정부는 식량 부족사태 해결을 위해 혼·분식 장려 등 범국민적 절미(節米)운동을 추진했다. 요식업체와 학생 도시락의 쌀과 잡곡 혼합비율을 30%이상으로 고시하고 학교에서는 학생들의 도시락 검사까지 했으며 매주 수요일과 토요일을 ‘무미일(無米日)’로 정했다. 3월부터는 막걸리 제조 시 쌀 사용을 금지시키는 한편 곡식을 축내는 쥐잡기 운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했다. 6월에는 서울시내 식량부족으로 하숙이나 자취를 하는 지방 학생들을 위해 대학 조기 방학조치를 취했다. 그 해 우리나라 최초로 ‘삼양라면’이 출시되어 부족한 식량난 해결에 힘을 보탰다. 

1963년 6월 27일 박 의장은 식량난 타개에 관한 특별담화를 발표하고 ‘정부는 여하한 일이 있더라도 국민을 굶기지 않도록 책임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 한다”고 비장한 각오를 밝히는 한편, 군정은 식량문제 해결을 위한 특단의 대책 수립에 나섰다. 그 무렵 나는 고등학교 3학년으로 내 인생의 길이 될 대학과 학과 선택을 위한 운명의 결단을 앞두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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