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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농 최양부의 자전적 농정사 <5>농업경제학에 뜻을 세우고 길을 찾아 나서다-⑤농의 내일을 찾아 같은 길을 걷게 된 숙명의 동학들
   

우농(愚農) 최양부

1968년 9월 김동희 농업경영연구소 초대소장이 유학을 떠났고 10월 윤근환 농촌진흥청 시험국 연구조정 과장이 2대 소장으로 부임했다. 동학의 김동희(1·3대), 윤근환(2대), 김성호(4대) 연구소장과 허신행, 강정일 학형 등을 연구소에서 만나 더 나은 농의 내일을 찾아 같은 길을 걷게 된 것은 숙명이었다.


1968년 1. 21사태 이후 나라는 안보위기 속에 영구집권을 도모하는 박정희 대통령이 그에게 저항하는 야당과 대학, 지식인, 언론계, 노동계 등과 대치 정국을 형성하면서 정치적 갈등과 긴장의 날들이 계속되었다. 박 대통령은 자신의 정치적 기반인 농민층 지지 확보를 위해 농업·농촌정책을 강화했다. 농공병진을 위한 농어민소득증대 특별사업(1968~1971) 추진과 함께 1970년에는 농촌근대화촉진법을 제정하고 농업진흥공사(현 한국농어촌공사)를 설립했다. 1972년 제3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1972~1976)을 시작하면서 정부는 농어촌경제의 혁신적 개발과 수출의 획기적 증대, 중화학공업 건설을 3대 기본목표로 설정하고, 식량 증산으로 주곡을 자급하며 농어민소득을 적극적으로 증대시키고, 경지정리 및 기계화를 촉진하고, 농어촌 보건시설을 충실히 하고 농어촌 전화 및 도로망을 확충하는 것 등을 구체적 목표로 정했다.

1971년 2월 청와대는 새로 육종된 다수확 신품종 벼인 IR667로 지은 쌀밥 시식회를 열었다. IR667의 육종은 허문회 서울대 교수가 1964년 연구에 착수하여 4년여의 각고의 노력 끝에 1967년에 성공한 우리 농업과학기술사는 물론 세계 벼 육종사의 새 장을 여는 역사적 사건이었다. IR667은 한국과 일본에서 재배하는 자포니카 벼와 동남아지역에서 재배하는 다수확 종인 인디카 벼를 수백 가지 조합으로 교배하는 무수한 ‘원연 교잡(서로 특성이 다른 품종 간 교배)’ 실험 결과로 얻은 잡종 가운데서 우수 품종을 선발하고 이를 다시 우리 기후환경에 맞게 조생종 자포니카 벼와 교배하는 ‘3원 교잡’을 통해 기적같이 얻은 볍씨다. 정부는 새 볍씨 이름을 ‘통일’로 정하고 1968년부터 농가 보급을 위한 4년여의 시험 재배를 했다. 1971년에는 총 550개(2750ha) 시험 단지에서 재배한 결과 10a 당 평균 550.9kg 라는 획기적인 수량을 수확했다. 정부는 1972년부터 통일벼 보급을 위한 강력한 증산 농정을 시작했다. 늘어난 생산량에 고미가(高米價) 정책까지 더해져 농가소득도 늘어나기 시작했다. 1977년 마침내 쌀 생산량 4000만 석을 돌파하며 국가적 숙원인 주곡자급을 달성했다. 정부는 우리 국민을 쌀밥걱정에서 해방한 ‘녹색혁명’을 영구히 기억하고 기리기 위해 통일벼를 동전 50원에 새겨 넣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1970년 4월 전국 지방 장관 회의에서 ‘새마을 가꾸기 운동’을 제창하고 11월 ‘전국 농어민소득증대 특별사업 경진대회’에서 농민 ‘하사용’의 ‘우리도 할 수 있다’라는 성공사례 발표에 감명을 받아 ‘새마을운동’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키기 시작했다. 정부는 1971년 4월 대선을 앞둔 1970년 11월 전국 3만3267개 자연부락에 시멘트 300∼350부대씩을 나누어주고 마을별로 알아서 사용하도록 했다. 1971년 말 정부는 ‘우수마을 우선 지원 원칙’을 새로 세우고 지난해 나누어준 시멘트를 생산적으로 잘 사용한 1만6600개 마을을 선발하여 시멘트 500부대와 철근 1톤씩을 나누어주면서 마을간 차등 지원으로 경쟁심을 유발하는 독창적인 한국형 농촌개발모델을 만들었다. 박 대통령은 1972년 4월 ‘근면, 자조, 협동’을 ‘새마을 정신’으로 선언하고 새마을운동의 본격 추진에 나섰다. 새마을운동은 1972년 10월 유신과 맞물리면서 농촌개발과 농민의식개조 운동을 넘어 도시와 공장 새마을운동으로 확대되었고 모두가 ‘우리도 한번 잘살아 보세’를 외친 국가재건운동이 되었다. 새마을운동은 북한의 천리마 운동과 대비되는 1970년대 한국사회를 휩쓴 농촌개조 운동이었고 국민의식개조 운동이었다.   

1968년 9월 김동희 농업경영연구소 초대소장이 박사학위를 위해 미국 하와이대학으로 유학을 떠났고 10월 윤근환 농촌진흥청 시험국 연구조정 과장이 2대 소장으로 부임했다. 윤 소장 취임 이후 김성호 연구관과 허신행, 강정일 학형(學兄)이 연구소에 새로 합류했다. 동학의 김동희(1·3대), 윤근환(2대), 김성호(4대) 연구소장과 허신행, 강정일 학형 등을 연구소에서 만나 더 나은 농의 내일을 찾아 같은 길을 걷게 된 것은 숙명이었다.

새로 연구관으로 부임한 김성호(金聖昊, 1934~2015) 선배는 농사단(NSD)를 창단한 NSD의 ‘전설적 인물’로 나는 대학 시절 NSD 모임에서 그를 처음 만나 카리스마 넘치는 특강을 들었다. 나와는 11년 차의 대선배여서 가까이 다가가기가 어려웠으나 그는 다양한 경험과 실사구시의 학자적 열정과 파고드는 집요함으로 후배들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었다. 그는 누구보다도 가까이에서 내 인생의 중요한 고비 때마다 진솔한 조언을 해준 내 인생의 멘토가 되었다.

1968년 12월 윤근환 소장의 배려로 임시연구원으로 연구소 근무를 시작한 대학 2년 차인 허신행 선배는 그가 대학 시절 NSD 단원으로 활동했고 동향이라는 사실 때문에 만나면서부터 호형호제하는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그는 학문적 진솔함보다는 높은 곳을 향한 야심이 넘쳤다. 1968년 2월 연구소 근무를 시작한 이후 선배들로 가득 찬 나무숲을 헤쳐나가야만 했던 나는 시간이 흐르면서 특히 대학 2∼3년 차 선배들과는 경쟁하는 사이가 되었고 때로는 그들의 견제를 받으며 불편한 관계가 되기도 했다. 허 선배와는 점차 그런 관계가 되어갔다.

1970년 3월 ROTC 복무를 마치고 나타난 강정일 학형은 1964년 대학입학으로 만나 4년을 같이 공부한 대학 동기생으로 과 대표를 지낸 솔직 담백한 독실한 기독교인이다. 당시 연구소는 농림부 이관 직후 늘어나는 연구수요로 인재난을 겪고 있던 터라 나는 곧장 그를 윤근환 소장에게 소개했고 우리는 연구소에서 평생을 같이하며 같은 길을 걷게 되었다. 그는 내가 선배들과 어려움을 겪을 때 마음 터놓고 이야기 나눌 수 있는 유일한 쉼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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