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농어민신문]

우농(愚農) 최양부 

정부는 1985년 5월 농지제도 개편과 농지보전대책에 관한 관계부처 회의를 개최하고 농지 소유 3정보 상환철폐, 임대차를 현실화하되 40% 이상의 고율 임대차료 상한선 규제, 부재지주에 대한 소득세 부과, 농지세분화 방지를 위한 일자(一子)상속제 도입 검토, 농가의 농지구입자금 지원방안 마련 등을 추진하기로 했다.


농수산부는 1986년 3월 5일 농어촌종합대책 발표의 여세를 몰아 ‘농지임대차관리법’ 제정을 서둘렀다. 1948년 7월 17일 제정 공포된 제헌헌법은 ‘경자유전(耕者有田)의 원칙’에 따라 ‘농지는 농민에게 분배하며 그 분배의 방법, 소유의 한도, 소유권의 내용과 한계는 법률로써 정한다’(제86조)라고 농지개혁 추진을 명문화했다. 8월 15일 출범한 이승만 초대(初代)정부는 농지개혁법 제정을 서둘렀고 1949년 6월 21일 마침내 개혁법을 공포했다. 농지개혁법은 ‘일체의 농지는 소작, 임대차, 위탁경영 행위를 금지한다.’(제17조1)라고 규정하고 이를 위반할 시에는 ‘그 농지를 무상몰수 또는 그 농지의 경작권을 상실케하고 100만 원(圓) 이하의 벌금을 병과 할 수 있다.’(제25조1)라고 정했다. 당시는 자작농체제의 확립으로 ‘소작과 임대차’를 명확히 구분해야 할 만큼 임대차는 우려할 만한 정책적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러나 1960~70년대 고도성장기를 지나면서 농가인구의 급격한 탈농이촌(脫農移村)이 일어나고 도시로 나가 비농민이 된 자녀들의 농지 상속 등으로 부재지주가 발생하고, 농가 간 농지임대차가 광범위하게 나타나면서 임대차의 허용과 규제 여부를 놓고 농민단체와 학계, 정부 간 논쟁이 일었다. 정부와 학계에서는 소작은 규제하되 임대차는 허용해야 하며 이를 위한 적절한 관리가 필요하다고 주장했으나 농민단체 등은 이는 소작제를 합법화하는 것이라며 강하게 반발했다. 그러다 전두환 신군부가 1980년 헌법을 개정하면서 ‘소작은 금지하되 임대차와 위탁경영은 허용한다’라고 규정하면서 농지임대차를 허용했다. 정부는 1982년 헌법이 허용한 농지임대차를 포함 농지 소유와 이용의 합리적 관리를 위한 농지법제정에 나섰으나 실패했다.
정부는 1985년 5월 농지제도 개편과 농지보전대책에 관한 관계부처 회의를 개최하고 농지 소유 3정보 상환철폐, 임대차를 현실화하되 40% 이상의 고율 임대차료 상한선 규제, 부재지주에 대한 소득세 부과, 농지세분화 방지를 위한 일자(一子)상속제 도입 검토, 농가의 농지구입자금 지원방안 마련 등을 추진하기로 했다. 농수산부는 농어촌종합대책 발표 직후인 3월 14일 농지국장(이관범)을 반장으로 하는 ‘농지임대차규제법 제정 작업반’을 구성했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연구원’)에서는 김성호 연구위원이 참여했다. 김 위원은 1986년 3월 이석채 청와대 경제비서관에게 농지임대차법 제정방안을 설명하고 5월에는 사공일 경제수석비서관에게도 보고했다. 연구원은 농수산부와 합동으로 농지임대차법 입법 요강을 만들어 8월 26일 농지제도 개선을 위한 서울공청회를 시작으로 전북 김제(9월 23일)와 경북 상주(9월 26일)에서 지방공청회를 개최했으며, 구례, 창녕, 예산, 음성, 광주, 홍천 등 6개 지역에서 별도의 좌담회를 개최했다. 이 좌담회에는 연구원의 김성호 연구위원과 김정호, 전경식, 김태곤, 박석두 연구원이, 농수산부에서는 이관범 국장 등이 참가했다. 정부는 10월 ‘농지임대차관리법(안)’을 확정하고 11월 정기국회에 제출하였으며, 심의를 거쳐 12월 17일 국회를 통과하고 1986년 12월 31일 공포했다. 그러나 법 제정을 반대하는 야당이 1987년 4월 ‘농지임대차관리법 중 개정법률안’을 제출한 이후 6.10 민주항쟁, 6.29 민주화 선언, 1987년 10월 제5공화국 헌법 제정, 1987년 대통령선거를 통한 노태우 정부 출범 등의 정치적 격변이 이어지면서 시행이 지연되었다. 임대차법은 제정 이후 4년이 된 1990년 8월과 12월에야 시행령과 시행규칙이 공포되어 시행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러나 임대차관리법은 제정을 위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농민단체의 시행 반대로 실기(失期)하면서 태산명동서일필(泰山鳴動鼠一匹)의 빛바랜 법이 되었고 1994년 12월 새로 제정된 농지법에 흡수되면서 폐지되었다.

정부는 1986년 농어촌종합대책을 통해 1983-84 소 입식 자금 금리 인하와 상환연기, 농어촌주택개량자금과 영농(영어, 양축)자금 금리 인하, 농기계 면세 유류 공급시한 연장 및 어업용 전기료의 농사용 전기료율 적용, 수리시설 개·보수비 보조 지원과 농지개량조합 장기채를 감면했다. 그러나 농민단체는 1980년 대흉작과 물가안정을 위한 농산물수입확대로 인한 농산물가격하락, 소값 폭락과 복합(통)영농 등 자연재해와 정책실패 때문에 농가부채가 누적되었다며 금융부담완화보다는 ‘부채감면(혹은 탕감)’을 요구했다. 일부에서는 농가부채를 감면 (혹은 탕감)하는 것은 농촌금융 질서를 해치고 농가의 ‘도덕적 해이’를 불러올 것이라며 반대했으나, 정부가 부실기업에 막대한 재정지원을 해주면서 농어가부채문제를 외면하는 것은 형평에 어긋난다는 주장이 팽팽하게 맞섰다. 정부는 결국 1961년 농어촌고리채 정리 이후 25년만인 1987년 3월 ‘농어가부채경감대책’을 발표하고 농어가의 고리사채 대체를 위한 중장기 저리자금 지원, 상환 기간 연장, 금리 인하조치 등을 단행했다. 그 후 1987년 12월 대통령선거운동 중에 김대중 후보가 ‘농어가부채 탕감’을 공약하면서 농어가 부채대책은 다시 뜨거운 정치 상품이 되었고 노태우 후보도 12월 7일 농어가부채 경감을 위한 ‘농어촌경제활성화종합대책’추진을 약속했으며 대통령 당선 이후 1988년 3월 활성화 대책을 발표했다. 이후 농어가부채대책은 선거철만 되면 농어민 표심을 공략하는 인기영합적 정치 상품으로 반복적으로 등장하게 되면서 정치적으로 오남용되고 있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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